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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순화의 마켓&마케팅

제품 라벨 뒷면에 ‘투표로 멍청이들 몰아내라’ 새긴 이 회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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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

소비자가 구매자로서 권한을 행사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고 시장과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행동을 ‘정치적 소비(political consumption)’라 한다. 정치적 소비는 주로 반대하는 기업의 상품을 거부하는 보이콧(boycott)과 지지하는 브랜드 제품을 의도적으로 구매하는 바이콧(buycott)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노 재팬, 미국의 바이 아메리카, 중국의 애국소비는 국가 차원의 보이콧, 바이콧이다. 분열과 대립이 심화하면서 기업의 일거수일투족이 정치·사회적 관점으로 해석돼 논란을 부르는 경우도 많아졌다.

파타고니아 유쾌한 캠페인 화제
소비자 찬반 가르는 건 진정성
철학 있는 기업의 행동은 응원

정치적 소비에 따른 보이콧과 바이콧

보수의 반발에도 소비자들이 공감했던 나이키의 캐퍼닉 광고. [AP=연합뉴스]

보수의 반발에도 소비자들이 공감했던 나이키의 캐퍼닉 광고. [AP=연합뉴스]

2018년 9월 나이키는 슬로건 ‘Just do it’의 30주년 기념 광고에 프로풋볼 선수 콜린 캐퍼닉(Colin Kaepernick)을 등장시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캐퍼닉은 경찰의 흑인 과잉 진압에 항의하는 의미로 경기장에서 국가 제창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얼굴과 함께 ‘희생이 따르더라도 믿음을 가져라’는 문구가 담긴 광고가 공개되자 이전부터 캐퍼닉을 공공연하게 비난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즉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보수주의자들은 나이키 운동화를 불태우고 로고를 찢는 동영상을 퍼뜨리며 불매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광고가 시작된 노동절 연휴 동안 나이키의 온라인 매출은 전년보다 31% 증가했는데, 전년도 증가율의 2배 수준이었다. 나이키 주가는 2주간 상승세를 유지해 연중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광고 메시지에 공감하고 지지한 소비자가 그만큼 많았던 것으로 설명된다.

고야 푸드 보이콧에 맞서 바이콧을 한 트럼프. [사진=인스타그램]

고야 푸드 보이콧에 맞서 바이콧을 한 트럼프. [사진=인스타그램]

히스패닉 식품 전문업체 고야(Goya) 푸드의 사례도 흥미롭다. 2020년 고야의 최고경영자(CEO) 로버트 우나누에(Robert Unanue)는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같은 지도자를 가진 미국은 진정 축복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정부의 반이민 정책을 반대하던 라틴계 인사들은 일제히 우나누에를 비난하며 고야 보이콧을 촉구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과 이방카 선임보좌관은 고야의 대표 상품인 검은콩 통조림과 함께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며 맞불을 놨다. 노골적으로 바이콧을 주도한 격이다.

노스웨스턴 대학의 안나 터크만(Anna Tuchman) 교수는 고야 사태의 영향을 실증 분석했다. 우나누에의 발언 후 2주간 고야의 매출은 22% 상승했는데, 구매자의 16.9%는 첫 고객이었다. 공화당 지지율이 높은 지역의 매출 증가율은 56.4%에 달했다. 라틴계 소비자의 반응은 의외였다. 언론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보이콧 목소리를 높이는 와중에 실제로 구매를 중단한 소비자는 많지 않았다. 바이콧이 보이콧을 능가한 셈이지만 그 효과는 2주가 지난 후 사라졌다.

보이콧 영향 컸던 버드 라이트 사태

고야 푸드 보이콧에 맞서 바이콧을 한 이방카. [사진=인스타그램]

고야 푸드 보이콧에 맞서 바이콧을 한 이방카. [사진=인스타그램]

보이콧의 영향은 대부분 제한적이지만 혼란이 가중되면 심각한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지난해 3월 버드 라이트는 딜런 멀바니와의 협업으로 거센 후폭풍을 맞으며 막대한 손실을 치렀다. 멀바니는 성전환 수술 과정과 사치스러운 일상을 소개하며 1000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확보하게 된 트렌스젠더 인플루언서다. 버드 라이트는 멀바니의 얼굴을 새긴 캔맥주를 제작해 선물했고, 캔맥주를 홍보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자 비난이 쏟아졌다.

보수 성향의 유명 인사와 소비자들은 버드 라이트 보이콧을 선언하며 맥주를 내다 버리는 영상을 퍼뜨렸다. 가수 키드록(Kid Rock)은 버드 라이트 캔을 쌓아두고 총을 난사하는 동영상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버드 라이트의 5월 매출은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고, 점유율은 멕시코 맥주 모델로에 뒤처지게 되었다. 미국 맥주 시장 판매량 1위, 라거 시장 50% 이상 점유율 등 20년 이상 지켜온 기록이 모두 깨진 것이다. 버드 라이트의 제조사인 AB인베브의 2023년 2분기 미국 시장 점유율은 14% 하락하고 주가도 17% 이상 폭락했다.

기후위기를 외면한 정치인을 심판하자는 파타고니아 캠페인. [사진=파타고니아]

기후위기를 외면한 정치인을 심판하자는 파타고니아 캠페인. [사진=파타고니아]

첫 3개월 동안은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과 중장년층의 매출 하락이 두드러졌지만, 이후 민주당 지지율이 높은 지역의 하락 폭이 점점 커지더니 보수 지역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멀바니의 편향된 성 인식을 문제 삼아왔던 인권 운동가, 성 소수자(LGBTQ+) 단체의 목소리가 뒤섞이며 여파가 커진 것이다. 보이콧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고 연말까지 이어져 버드 라이트의 4분기 매출도 전년 대비 32% 떨어진 수준에 머물렀다.

논란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소비자의 지지와 비난을 가르는 핵심 기준은 진정성이다. 2020년 미국 대선 당시 파타고니아는 일부 제품의 라벨 뒷면에 ‘멍청이들을 투표로 몰아내라(VOTE THE ASSHOLES OUT)’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기후 위기를 외면하는 정치인을 심판하자는 취지였다. 오랜 기간 환경보호에 앞장서 온 파타고니아의 도발은 유쾌하고 창의적인 제스처로 받아들여졌다. 나이키의 모험에 지지가 뒤따른 것도 30년간 지켜온 도전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층의 호응을 기대하며 트렌스젠더와 손잡았던 버드 라이트는 성소수자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정치인을 후원해온 사실이 밝혀져 이중성이 드러났다.

대체 불가한 브랜드는 보이콧에도 거뜬

혼란 속에서 브랜드가 건재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은 대체 불가성이다. 고야 푸드가 핵심 소비층의 심기를 건드렸음에도 고객 이탈이 미미했던 것은 히스패닉 고객의 입맛을 그만큼 만족시키는 대체 브랜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버드 라이트를 떠난 고객들은 같은 미국 브랜드인데다 맛도 비슷한 쿠어스와 밀러 라이트를 대신 선택했다.

에델만 신뢰 지수 보고서에 의하면 이미 수년 전부터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에서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기관으로 가장 신뢰하는 대상은 정부가 아닌 기업이다. 사회적 문제 해결자로서 기업의 역할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젊은 세대는 정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할 뿐 아니라 때로는 기업의 분명한 입장을 원한다.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지닌 기업의 소신 있는 행동에는 응원과 지지가 뒤따를 것이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