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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혜의 마음 읽기

최고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루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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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우리는 언젠가부터 가족과 친구에게 홈쇼핑 쇼 호스트 같은 말을 한다. “백화점에 가서 최고 좋은 부위만 사와서 끓인 고깃국이야.” “이거 왕에게 진상했던 지리산 고종시(곶감)예요.” “그 뮤지엄 일본 건축가가 지은 건데 빛을 예술적으로 다뤘어요. 아직도 안 가봤어요?”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니 최상의 식재료만 쓰고, 내 감식안에 걸맞은 작품 전시나 건축물을 관람한다. 애호가들은 보통 자기 관점을 신뢰하며, 아는 것도 많고 달변이다. 늘 부족한 것은 시간이어서 자신이 보기에 값어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마주하려 한다. 이런 부류를 보면 이내 지루해진다. 그래서 체호프 소설에 나오는 어설픈 관리나 손더스 작품에 나오는 하자 많은 인물들을 읽으며 날것의 삶을 목격하고 싶어진다.

취향 도취돼 누군가 상처주기도
완벽하지 않고 결함 많은 우리들
비어 있는 곳은 늘 상상력 자극
측량하기보다 관찰당하는 게 삶

[일러스트=김지윤]

[일러스트=김지윤]

최고를 쫓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은 왜 따분함을 줄까. 인풋(input)이 좋다고 해서 아웃풋(output)도 좋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눈코입으로 들어간 최상품들은 삶의 품격이나 인간성과 인과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그런 행위들이 무언가를 생략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물질 숭배, 힘에 대한 찬사, 강한 자기주장 등이 엿보인다. 자신을 감식가나 향유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사실 소비자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바쁜 그들은 평범성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전형성’에서 맴돌다가 ‘통속성’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하다. 은근히 드러내는 힘에 대한 찬사는 더 고개를 젓게 한다. 힘은 그것을 인식하되, 존중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고 시몬 베유도 말하지 않았던가. 선택에 대한 강한 자기주장은 취향이란 말로 표현되지만, 취향은 다른 한편 판단이고 배제이고 상처다. 취향에의 도취는 때로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기도 하며, 다른 많은 것을 난도질하다 사위어간다. 우리는 판단이나 신뢰와 무관하게 우리 자신이고 싶다.

세련됨이란 뭘까?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당대의 누보로망 작가들을 비판의 시선으로 봤는데, 그들이 전후 세계에 참여적으로 뛰어들기보다 그로부터 맺힌 과실만 따먹으며 형식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귀족적 취향과 엄격함을 가진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그런 점에서 뒤라스에게는 못마땅한 작가였고 둘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다.

“우리는 도움이 되는 것만 보고 듣는다. 이 모든 제한된 사고에는 불행한 부산물이 있다. 에고다. 누가 생존하려 하는가? ‘나’다.” 조지 손더스의 이 말은 핵심을 찌른다. 우리는 보통 빛을 좇는다. 하지만 그 광채는 아는 것이 발전밖에 없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밤의 찬란함’이다. 예술가의 가장 탁월한 성취는 늘 강력한 어둠으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밤을 움켜쥐고, 밤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검정은 작가들에게 가장 친근한 색이고, 밝아진다고 해봐야 회색이거나 사막의 모래색 정도다. 베케트나 블랑쇼 모두 이런 색의 계열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주저하거나 침묵하는 향유자가 그들과 더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른다.

무너져가는 삶의 절망을 아름답게 그린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의 작품 ‘알리바바’는 겉모습은 그럴듯하나 술에 절어 사는 남자와, 돈 많은 남자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별 볼 일 없는 여자의 하룻밤 만남을 담고 있다. 이런 인물들을 읽는 경험은 값지다. 최고는 아니지만 상처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들의 ‘에고’는 강하지 않아 천천히 그 주변에 근접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대상화되거나 소유되지 않고 오래 곁에 머문다. 이런 미학을 구현한 작가의 관찰과 묘사는 서사의 질주 속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완벽함보다 결함 있는 무언가를 좋아한다. 그게 실은 자신의 모습이거나 거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어 있는 곳은 늘 상상력을 자극해 우리가 ‘빔-채워짐’을 동시에 생각하게 만든다. 체호프 역시 『마차에서』라는 작품에서 봄의 마력에 저항하는 불행한 여자 마리야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체호프의 열혈 팬 손더스는 이 작품에 대해 “결혼 안 하고 도로가 안 좋은 곳에 사는 외로운 여자”인 마리야가 너무 외롭지는 않도록 응원하며, 체호프에게 그 형편없는 삶에도 희망을 한 줌 가져다 달라고 마음속으로 빈다.

시야가 제한되면 가능성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이 세상을 측량하는 쪽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런 우리를 관찰하는 사람이 더 많다. 즉 자신이 가치 있는 것을 골라낸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히려 관찰당하는 쪽에 놓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무지(無知)가 아닐까. 그것이 제 발에 걸려 자주 넘어지는 이유이고, 결국 나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간극이 크게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의 자기 이해를 흔들어 위험한 앎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로부터 벗어날 한 가지 방법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