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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준의 인사이드 아트

아트 파워, 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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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준 전 리움미술관 부관장·미술비평가

이준 전 리움미술관 부관장·미술비평가

오래전 뉴욕현대미술관(MoMA) 전시장 한구석에 사탕 한 무더기를 쌓아 놓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설치작품을 보고 당황한 적이 있다. 현대미술이 진화할수록 관람객뿐만 아니라 전문가에게조차 전시장에서 이러한 경험은 다반사이다. 작가의 태도와 선택에 따라 모든 것이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고, 단순한 아이디어 자체가 예술이 되는 세상이다. 개념미술이나 추상미술의 경우는 쉽게 흉내 내기가 가능하고,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면 더 쉽게 예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나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 수많은 작가들이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누구는 인정을 받고 누구는 소외된다. 누가 예술을 정의하고, 무엇이 예술이 되고 어떤 것은 예술이 되지 못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는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을 주로 양식적인 측면보다는 제도 비판적으로 해석해 왔다.

점점 난해해지는 예술의 정의
금세기 자본의 세계화와 함께
수퍼리치·갤러리스트 힘 커져
미술정보 미·유럽 편향은 문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무제’(USA Today), 1990년. [사진 이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무제’(USA Today), 1990년. [사진 이준]

오늘날 현대미술은 미술 제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거나 해체하고 재구축하려는 고도의 지적인 작가나 전시기획자, 예술감독과 같이 일종의 게임체인저들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다. 그들은 무엇이 새로운 문화상품이 될 것이고, 의미 있는 담론이 될 것인가를 잘 아는 전략과 통찰력을 지닌 전문가들이다. 지난 20여년간 세계 미술의 영향력 있는 인사를 매년 평가해 왔던 잡지 ‘아트리뷰’의 ‘파워 100’을 종합해보면 미술제도 내에서의 권력과 변화하는 지형도를 압축해서 볼 수 있다. 2023년 100명의 통계자료를 직업별로 분석해보면 작가(38명·팀), 큐레이터·미술관장(25명), 갤러리스트·미술시장 인사(19명), 이론가(10명), 수집가·후원자(8명) 순으로 분포돼 있다. 국적·지역별로는 비서구권인 아시아(17명) 및 아프리카(8명), 남미(7명), 중동(4명)지역 인사들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하나의 상징적인 지표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 다양한 문화권력들이 새로운 유행이나 담론을 만들어내고 주도하며 예술창작과 수용의 방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작가들의 개인적 역량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들의 성공은 지식과 자본, 인맥으로 예술계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면, 문화 자본(지식)과 경제 자본(돈), 사회자본(인맥)의 상호작용이 ‘합의된 형태’로 예술 정의에 관여하는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난해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의 제도화, 상품화 과정도 이러한 시스템에 의해서 가능하다. 지난 세기에는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비평가와 전시기획자, 미술관장들이 문화생산자로서 미술 담론을 주도해왔다. 하지만 자본의 세계화와 더불어 수집가, 수퍼리치들과 그들을 매개하는 미술시장 관계자, 갤러리스트들이 세계 미술에 끼치는 영향력은 점차 커지고 있다.

독일 경제전문지 캐피탈은 매년 동시대 영향력 있는 ‘세계 100대 미술가’들을 ‘쿤스트 콤파스(Kunst Kompass)’에 순위와 함께 선정 발표한다. 세계적으로 공신력 있는 미술관의 작품소장 여부나 개인전, 그룹전 참여, 주요 비엔날레와 국제아트페어, 갤러리 전시, 수상경력 등이 순위 평가와 선정의 중요한 잣대가 된다. 유명 작가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한국 미술시장에 국제적 지표로 자주 인용된다. 2023년 통계를 국적, 지역별로 보면 독일(28명), 미국(25명), 영국 (12명), 기타 유럽(24명), 캐나다(2명), 중동·아시아(6명), 남미(2명), 아프리카(1명) 순으로 분포해 있다. 하지만 북미·유럽 지역의 작가가 91%를 차지하고, 그중 독일 작가(발행국가)가 28명으로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전 세계의 유력한 미술전문 매체들이 이와 유사하게 ‘가장 수집할 만한 작가’ ‘블루칩 작가’ ‘이머징 작가’ 혹은 ‘여성작가’ ‘흑인 작가’ 리스트 등을 매년 다양하게 분석해 제공한다. 이러한 정보들은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 수집가들에게는 누가 명성이 있고, 어느 지역 어떤 스타일의 작가가 새롭게 부상하는지를 쉽게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매체를 통해 우리는 김환기와 이우환이 블루칩 명단에 오르고, 양혜규라든가 아니카 이, 이미래 등 한국 작가들이 주요 순위에 오르는 것을 타자화하여 공유한다. 문제는 이러한 국제적인 미술정보들이 북미, 유럽 작가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서구 사회뿐 아니라 비서구권, 신흥국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비엔날레라든가 국공립, 사립미술관뿐 아니라 미술시장 역시 이 같은 우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준 전 리움미술관 부관장·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