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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아도 즐길 수 있죠"...귀로 코로 봄꽃축제 즐기는 시각장애인

중앙일보

입력

무슨 색 꽃이에요? 이야, 향기가 진짜 좋네.

2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서로 옆 작은 숲에서 한 여성이 살구꽃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귀와 연결된 마이크를 착용한 인미현(63) 현장 영상해설사가 “예쁜 흰색 꽃”이라고 답했다. 손으로 꽃잎을 쓰다듬고 코로 꽃내음을 맡던 이 여성은 시각장애인이었다. 이날 여성을 포함해 시각장애인 10명이 꽃 나들이에 나섰다. 이 중 8명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꽃축제였지만 모두 귀와 코, 피부로 초봄을 만끽했다.

영등포구청·문화재단은 시각장애인도 봄꽃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마음으로 걷는 봄꽃 산책’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이날 오후 1시 50분쯤 시각장애인 참가자와 동행자 짝꿍까지 총 20명이 봄꽃거리에 들어섰다. 약 한 시간 전까지 비가 오고 기온도 낮았지만 이들의 표정엔 설렘이 묻어났다. 참가자들은 짝꿍의 팔꿈치에 손을 대거나 흰지팡이(시각장애인 전용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29일 오후 3시쯤 '마음으로 걷는 봄꽃 산책' 프로그램에 참가한 시각장애인들이 동행자의 팔꿈치를 잡고 이동하고 있다. 박종서 기자

29일 오후 3시쯤 '마음으로 걷는 봄꽃 산책' 프로그램에 참가한 시각장애인들이 동행자의 팔꿈치를 잡고 이동하고 있다. 박종서 기자

참가자들은 봄꽃 축제가 펼쳐진 길을 3차원으로 구현한 입체 지도와 봄꽃거리 중심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의 모형을 손으로 만졌다. 서강대교 남단에서 요트장까지 약 1㎞ 산책 경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산책 중 살구·산수유 나무 앞에선 잠시 멈추기도 했다. 냄새와 촉감으로 봄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5년째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관광 해설을 하는 인 해설사는 “시각장애인들의 뛰어난 촉각·청각·후각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설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참가자가 여의서로·국회 3D 지도를 손으로 만져보고 있다. 박종서 기자

시각장애인 참가자가 여의서로·국회 3D 지도를 손으로 만져보고 있다. 박종서 기자

산책로 중간에서 진행된 밴드 공연은 참가자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밴드 펀 퍼니스트의 첫 곡이 시작되자 곳곳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한 남성은 오른손에 벚꽃 나뭇가지를 들고 흔들며 음악을 즐겼다. “연주에 사용됐다는 행 드럼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던 한 참가자는 짝꿍의 도움을 받아 둥근 모양의 행 드럼을 어루만졌다. 아코디언 연주자 김희명(40)씨는 “참가자들이 듣기 좋은 연주곡을 선정하려고 노력했는데 재밌게 듣고 큰 호응까지 해주니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오른손에 벚꽃 나뭇가지를 든 시각장애인 참가자가 밴드 ‘펀 퍼니스트’ 연주에 맞춰 손을 흔들고 있다. 박종서 기자

오른손에 벚꽃 나뭇가지를 든 시각장애인 참가자가 밴드 ‘펀 퍼니스트’ 연주에 맞춰 손을 흔들고 있다. 박종서 기자

약 1시간쯤 꽃을 즐기며 걷다 보니 마리나 컨벤션센터에서 다다랐다. 이곳에서 요트를 탄 참가자들은 선상에서 봄바람을 맞기도 하고, 갈매기에게 과자를 던져주기도 했다. 배 내부에선 하모니카 공연이 펼쳐졌다. 눈을 감고 연주를 듣던 시각장애인 장경석(66)씨는 “마음이 너무 편안했는데 살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며 “잊지 못할 추억을 쌓은 것 같다”고 말했다. 류정일(66)씨는 “요트를 처음 타봐서 가슴이 너무 뛰었다”며 “요트 위에서 들은 하모니카 연주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참가자가 마리나 컨벤션센터에 정박된 요트에 탑승하고 있다. 박종서 기자

시각장애인 참가자가 마리나 컨벤션센터에 정박된 요트에 탑승하고 있다. 박종서 기자

시각장애인과 동행자가 갈매기를 향해 과자를 던지고 있다. 박종서 기자

시각장애인과 동행자가 갈매기를 향해 과자를 던지고 있다. 박종서 기자

시각장애인 참가자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이날 프로그램은 다채로운 경험이 됐다. 이날 행사를 지켜보던 시민 김지환(28)씨는 “벚꽃은 눈으로만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편견이었다”고 말했다. 짝꿍 신미정(57)씨는 “꼭 꽃을 시각으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보이지 않아도 귀와 손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요트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듣던 류정일(66, 왼쪽에서 네 번째)씨가 웃고 있다. 류씨는 ″요트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들은 것이 오늘 중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박종서 기자

요트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듣던 류정일(66, 왼쪽에서 네 번째)씨가 웃고 있다. 류씨는 ″요트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들은 것이 오늘 중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박종서 기자

지난해 한국장애인개발원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의 연평균 여행 경험은 약 3.27회로 한국인 평균인 6.21회와 비교하면 절반 정도다. 류씨는 “나 같은 전맹(全盲)은 밖을 다니기 쉽지 않은데 시각장애인을 위한 관광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창숙(52) 서울시각장애인연합회 영등포지회장도 “이런 행사가 많아지면 시각장애인들이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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