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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년 와인 역사…이곳에 오면 누구나 술꾼이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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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0년째 신혼여행 ⑪ 조지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전경. 고대 요새이자 지역 최고의 전망대로 통하는 ‘나리칼라’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조지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 중 하나다. 중앙의 황금 지붕 건물이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성 삼위일체 성당(사메바)’이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전경. 고대 요새이자 지역 최고의 전망대로 통하는 ‘나리칼라’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조지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 중 하나다. 중앙의 황금 지붕 건물이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성 삼위일체 성당(사메바)’이다.

조지아란 나라가 있다. 캔커피 이름이냐고? 지도를 펼쳐보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동유럽과 서아시아 경계에 조지아가 있다. 조지아는 8000년 역사를 가진 와인의 본고장이자, 모든 음식이 와인과 어울리는 신묘한 미식의 나라다. 그곳에서 한 달을 살았다. 조지아에 있는 동안 체중이 5㎏이 늘었다.

아내의 여행

성 삼위일체 성당.

성 삼위일체 성당.

식탐이 있는 편이다. 자고로 음식 앞에서는 누구나 가장 솔직한 모습이 나온다고 믿는다. 나는 맛있는 걸 먹으면 남들보다 적어도 두 배쯤 행복해진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의 한 달 살기는 먹고 마시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내 행복의 절반은 2022년 4월 조지아라는 낯선 땅에 두고 온 것만 같다. 트빌리시에 머물며 매일 한 병 이상의 와인을 마셨으니, 다 합치면 서른 병쯤 되려나.

조지아 와인은 대략 8000년의 역사를 헤아린다. 그 까마득한 시절 이 땅의 사람은 오크나 스테인리스 탱크가 아니라 거대한 토기에 와인을 만들어 놓고 숙성시켜 먹었다.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데, 조지아 특유의 크베브리(Qvervri, 계란 모양의 큰 토기) 와인이다. 과거 한국에 집집마다 된장 항아리가 있었듯이 조지아 가정에는 이 와인 항아리가 가족 수만큼 있다. 자식이 태어난 해에 와인 항아리를 묻고 성인이 되면 꺼내 마시는 식이다. 크베브리 와인은 떫은 맛을 내는 타닌 성분이 높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그 거칠고 텁텁한 맛이 내게는 몹시 인상적이었다.

와인 숙성을 위한 전통 용기.

와인 숙성을 위한 전통 용기.

내가 가장 좋아한 현지 음식은 ‘시크메룰리(Shkmeruli)’다. 입에 넣는 순간, 단번에 한국인을 위한 완벽한 와인 안주란 생각이 들었다. 튀긴 닭에 마늘과 크림소스. 이 세 조합에 딴지를 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토기에 담아 오븐에서 익힌 이 전통 음식은 그 자리에서 와인 한 병을 비우게 한다. 한국에 돌아온 요즘도 옛날 통닭을 사다 마늘과 크림소스를 붓고 그 맛을 흉내 내곤 한다.

크베브리 와인은 타닌 성분이 높아 텁텁한 맛이 강한 편이다.

크베브리 와인은 타닌 성분이 높아 텁텁한 맛이 강한 편이다.

조지아에서는 트래킹을 하러 갈 때도 와인과 함께였다. 평소 음주에 관해서는 엄격한 편이라 정상에서도 막걸리, 하산해서도 막걸리를 찾는 한국 어르신의 등산 문화를 영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 내가 고된 산행 끝에 와인 한 모금이 주는 달콤함에 눈을 떠버린 것이다. 해발 2200m 카즈베기에서 내려온 뒤 먹었던 시크메룰리와 와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조지아가 내게 준 행복의 절반이 그 한 잔에 있었다.

남편의 여행

닭요리 ‘시크메룰리’.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닭요리 ‘시크메룰리’.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술이 약한 편이다. 조지아 와인에 빠진 아내는 점심부터 코르크 따는 일이 적지 않았기에, 이번 여행은 내가 주도하는 날이 많았다. 일단 더 술기운이 오르기 전에 집 밖으로 아내를 끌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조지아는 대한민국의 3분의 2 크기다. 수도 트빌리시에서 한두 시간 사이에 다녀올 만한 근교 여행지도 많다. 트빌리시로부터 약 100㎞ 떨어진 시그나기도 그중 하나다.

언덕 위의 요새 도시 시그나기.

언덕 위의 요새 도시 시그나기.

시그나기는 인구 15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의 자랑은 크게 두 가지다. 일단 ‘사랑의 도시’라는 타이틀이 유명한데, 미국 라스베이거스처럼 24시간 혼인신고가 가능하다. 시그나기 지역은 예부터 외세의 침입이 잦아, 해발 800m 언덕에 오랜 시간에 걸쳐 요새를 만들었단다. 저 멀리 적이 보이면, 살아남기 위해 성안으로 모이곤 했다는데 그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사랑을 고백했던 걸까. 오지의 작은 마을까지 손을 잡고 왔을 연인을 생각하면 언제가 됐든 당장 혼인 서류에 도장을 찍어줘야 할 것 같긴 하다.

또 다른 자랑은 죽어서야 조지아의 국민 화가로 불리게 된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다. 니코는 시그나기 인근 미르자니 마을에서 자랐는데, 그의 러브 스토리는 한국에도 제법 알려져 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동상.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동상.

가난한 화가 니코는 우연히 마을을 찾은 한 프랑스 배우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져 버린다. 꽃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니코는 전 재산과 피를 판 돈까지 탈탈 털어 백만 송이 장미를 선물하였으나…. 그의 그림도, 사랑도 살아서는 인정받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심수봉이 부른 ‘백만 송이 장미’가 이 슬픈 이야기를 우리말로 옮긴 노래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마침 은덕의 술버릇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고, 또 마침 그의 18번이 ‘백만 송이 장미’였던 터라 이 곡은 내게도 익숙했다.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꽃을 피우면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라는 노랫말이 와 닿지 않았는데, 시그나기에서 그 아리송한 가사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도 와인 한 병을 깠다.

☞조지아 트빌리시 한 달 살기· 비행시간: 14시간 이상(직항은 없고 튀르키예나 폴란드 등을 경유해야 함) · 날씨: 한국과 비슷함, 봄과 가을 추천 · 물가: 태국 방콕 수준(특히 와인이 저렴) · 숙소:  300달러 이상(집 전체, 대사관이 몰려 있는 부촌 바케 지역은 500달러 이상)

김은덕·백종민

김은덕·백종민

글·사진=김은덕·백종민 여행작가 think-thi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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