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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와 어선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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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위성욱 기자 중앙일보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란 것이 있다. 큰 사고 1건이 일어나기 전 29건의 작은 사고와 300건의 사소한 징후가 나타난다고 해 ‘1:29:300’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재난 현장에서 교과서처럼 인용되는 이론이다. 1931년 미국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윌리엄 하인리히가 7만5000건의 재난사고를 분석해 내놓은 결과다.

최근 경남 통영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반복되는 어선 전복과 침몰 사고를 보면서 이 법칙이 떠올랐다. 본격적인 조업이 이뤄지는 봄에 이렇게 자주 어선 관련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어쩌면 안전 조업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내는 전조 증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해상 어선 전복·침몰 사고 이미지. [연합뉴스]

해상 어선 전복·침몰 사고 이미지. [연합뉴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서 이런 의문은 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7일 오전 2시 44분 경북 포항 구룡포읍에서 120㎞ 떨어진 해상에서 연안 통발어선(9.77t)이 전복됐다.

당시 바다에는 2.5~3m 높이 파도가 쳤고, 풍랑 예비특보도 사고 하루 전인 16일 오후 4시에 내려졌다. 하지만 10t 미만 소형 ‘연안’ 어선인 이 배는 홍게(붉은 대게)를 잡으려고 ‘원거리 조업’에 나섰고, 보통 40~50t 되는 선박이 운항하는 먼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

지난 9일 오전 경남 통영 욕지도 남쪽 68㎞ 해상에서 뒤집어진 채 발견된 근해연승어선(20t)도 궂은 날씨 속에 조업을 했다. 통영 해경은 사고 추정 시각을 이 배의 항적 기록이 끊긴 전날(8일) 오후 8시 55분 이후로 보는데, 약 14시간 전인 이날 오전 7시부터 욕지도 인근 해상에는 풍랑주의보가 발효됐다. 비슷한 시각 최고 4.8m 높이 파도와 초속 14m 강풍이 불었던 것으로 관측됐다.

지난 1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 서쪽 20㎞ 바다에서 전복된 갈치잡이 근해연승어선(33t)도 사고 당시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풍랑주의보가 발효되면 15t 미만 어선은 출항할 수 없지만, 이들 사고 선박처럼 15t 이상이면 2척 이상이 선단을 꾸려 조업할 수 있다. 태풍주의보·태풍경보·풍랑경보 때 모든 어선은 출항이 금지되지만, 이런 기상특보가 발효되기 전 예비특보 때에는 출항 금지나 대피 명령을 권고만 할 수 있다.

지난 14일 오전 4시 20분쯤 통영 욕지도 남쪽 8.5㎞에서 발생한 쌍끌이 대형 저인망어선(139t) 침몰 사고는 조업한 정어리 40t을 어창(魚艙)이 아닌 선미 갑판에 그물도 풀지 않은 채 쌓아두고 운항 하다 사고가 난 것으로 해경은 추정하고 있다.

사례별로 정확한 사고 원인은 해경의 추가 조사가 있어야겠지만 곳곳에서 드러난 정황만 보면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악천후 출항 등 무리한 조업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해마다 조업철에 이런 사고가 반복된다면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