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의정 충돌에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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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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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대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나흘 만인 6월 28일, 병원 앞까지 닥쳤다. 의료진은 부상자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치료를 계속했다. 얼마 안 가 북한군이 국군 저지선을 뚫고 병원에 난입했다. 부상자와 의료진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의료진은 끌려갔다. 공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6·25 서울대 의대 학살사건이다. 추모비가 서울대병원에 있다.

응급실 비운 의사 비난받아 마땅
디테일 없이 우격다짐, 정부도 문제
이념보다 뿌리 깊은 계층갈등 노출
애꿎은 국민만 각자도생 내몰려

이유야 어떻든 이번 의정 충돌에서 전공의가 응급실·중환자실·수술실을 떠난 건 유감이다.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곳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환자를 등지는 모진 행태에 국민은 놀라고 실망했다. 환자를 내 가족이라고 여겼으면 그랬겠나. 중증·응급환자만이라도 번갈아 지켰으면 더 많은 응원을 받았을 텐데 아쉽다. 환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난주 방재승 전국 의대교수 비대위원장이 “국민 없이는 의사도 없다는 걸 잊었다”고 말했다. 사과가 너무 늦었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국민과 의사 사이에 쌓인 상처와 불신은 오래 남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의 발언은 도를 넘었다. 환자 곁에 남은 전공의를 조롱했다. “평생 박제해야 한다”는 식의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의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말했다. 우월감과 특권의식이 묻어나는 부적절한 발언이다. ‘겸손한 자가 강한 자’라는 진리를 모르는 모양이다. “이런 나라에 살기 싫어 용접을 배우고 있다” “포도 농사를 짓겠다” 같은 말이 쏟아졌다. 의사가 용접이나 포도 농사를 못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은 아니다. 당장 대한용접협회는 “의사들이 용접을 우습게 생각하는 듯하다”고 유감을 표했다.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의 치부인 계층·빈부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념·지역·세대 갈등보다 뿌리 깊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더 심해졌다. 요새 사석에서 균형감을 잃고 과하게 의사 편을 드는 사람이 눈에 띈다.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전공의가 혹사당한다. 차라리 잘됐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1년쯤 놀면 어떻냐”고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 의아했다. 환자 걱정은 관심 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었다. 딸이 레지던트 2년 차였다.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온 나라가 이기심의 수렁에 빠졌다.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부의 일 처리는 서툴고 거칠다. 전략도, 홍보도 부족하다. 의대 증원은 오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안이다. 어떻게 풀지 정부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2000명 증원의 근거가 무엇인지, 실제로 현장에서 몇 명이나 더 가르칠 여력이 있는지, 뒤죽박죽 의료 수가는 어떻게 개선할지, 격무인 전공의의 노동인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정부가 디테일을 건너뛰고 덜컥 2000명 증원을 강행하는 바람에 반발이 커졌다. 너무 만만하게 봤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였거나. 4대 필수의료 패키지는 증원 발표 불과 닷새 전에 나왔다. 좀 더 일찍 마련해 시간을 갖고 의료계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다급해진 정부가 이달에 전공의 처우개선 토론회를 잇따라 열었다. 그동안 뭐하다 이제 와서?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증원 규모도 복수 안을 놓고 그 흔한 공청회라도 열었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쉬쉬하다 군사 작전하듯 전격 발표했다. 단숨에 대학별 배정까지 마친 건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나라를 뒤집어 놓을 일인가. 처음에 정부는 지지율 상승에 내심 고무됐던 것 같다. 생각이 짧다. 환자가 불편해지면 정부가 욕을 먹게 돼 있다. 지지율이 꺾이고 사태가 심상치 않자 부랴부랴 유화 제스처를 보냈다. 정부의 실력이 딱 이 정도 아닌가 싶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노동·교육·연금 3대 구조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신년사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2022년 대선 공약이었다. 정권 전반부, 개혁의 골든타임이 다 가도록 손도 못 댔다. 지난해 뜬금없이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며 전선을 넓혔고, 국운이 걸린 듯 엑스포에 매달렸다. 잇따른 구설을 수습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의사 증원 하나 매끄럽게 못 풀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3대 개혁은 언감생심이다. 총선이 끝나면 새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이합집산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 정권의 힘은 갈수록 떨어진다. 국정관리 능력이 부족하고, 힘마저 빠진다면 무슨 수로 3대 개혁을 할 수 있겠나.

이번 사태는 의사도 잘못했고, 정부도 잘못했다. 양비론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국민을 불안하게 한 것만으로도 양측 모두 할 말이 없게 됐다. 사과부터 해야 한다. 의정 충돌을 중재할 만한존경받는 어른도, 정치인도 안 보인다. 섣불리 나섰다가 망신만 당할 분위기다. 그러는 사이 국민은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며 각자도생의 정글로 내몰렸다. 의지할 곳이 없다. 나라가 어수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