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여인과 합주하는 세종…영웅화 안하니 더 좋구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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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호 21면

[사진 파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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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에 몇 안되는 영웅이다. 한글 창제라는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상상력을 가미한 영화나 드라마도 꽤 나왔다. 그런데 ‘오페라의 유령’ 같은 가면을 쓰고 남장 여인, 천민 악사와 함께 서툴게 악기 연주를 하는 세종이라니, 지금껏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이다. 태종실록에 ‘세종이 청년 시절 악기 연주를 즐겼다’는 한 줄 기록이 있다지만, ‘팩션 사극’의 상상력은 한계를 모른다.

19일 개막한 창작뮤지컬 ‘낭만별곡(사진)’은 여러 모로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세종 시대 우리 음악이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어 가는 과정이라는 소재부터 유니크한데,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2022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에서 111:1의 경쟁력을 뚫고 최우수상을 받은 탄탄한 스토리로 풀어내 현재 영상 콘텐트도 개발 중이다.

역사 소재 뮤지컬은 흔히 한 사람의 일생에 포커싱한 영웅 서사로 흘러가기 쉽지만, 세종이라는 히어로를 원톱 주인공으로 세우지 않아서 돋보인다. 궁중 연례 기관인 이원(梨園)에 왕자 신분을 숨기고 들어가는 ‘이도’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남장을 하고 잠입한 여인 ‘예성’, 저잣거리 천민 출신이지만 음악성 넘치는 ‘동래’, 그리고 오합지졸 악사들을 관리하는 ‘박연’까지, 각자의 이야기가 엮인다.

모티브는 세종과 박연의 아악 정비 프로젝트다. 시강원에서 세종에게 글을 가르친 문관 박연이 정간보 제작, 국악기 정비 등 국악의 기틀을 세우고 ‘한국 역사상 3대 악성’이 되기까지, 그의 음악적 재능을 간파한 세종의 혜안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견충돌도 있었는데, 중국 황실 음악을 따르려 한 박연에 비해 세종은 고유의 민속음악인 향악에 주목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팩트다. 결국 세종의 뜻대로 우리만의 궁중음악인 아악을 정비하게 되는 과정이 왕자와 천민 악사, 남장여인의 소통과 어울림에서 비롯됐다는 낭만적 스토리텔링이 더해졌다.

해금과 피리, 가야금 합주가 메인이 되는 음악도 울림이 좋다. 합주 개념이 없던 국악기들이 마구 충돌하다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흐름 자체가 작품의 내용이자 형식이 됐는데, 국악이 과하게 자기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피아노 등 양악기의 서정적인 연주에 매력적인 색깔을 부여한다.

우리 음악 자체를 상징하는 솔로 무용수의 존재도 예술적이다. 한국무용에 기반한 춤사위로 무대를 관통하는데, 젠더 프리로 남녀 무용수가 더블 캐스팅되어 다른 멋을 보여준다. 영웅을 앞세운 ‘국뽕’이나 애써 한국적인 색깔에 천착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한국미가 흘러넘치는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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