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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과도한 ‘물가의 정치화’는 경계해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82호 34면

개별품목 정부 개입 지나치면 부작용 초래

MB 때 물가 공방 무리한 정책으로 이어져

시장가격 보조 대신 취약층만 지원 검토를

며칠 전 미국의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인플레이션은 때때로 울퉁불퉁한(bumpy) 길을 간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달 “물가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언제 다시 튈지 모르는 울퉁불퉁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요즘 한국인들은 ‘울퉁불퉁한’ 물가의 살풍경을 목도하고 있다.

물가는 곧 민생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물가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것도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어서다. 그렇다고 개별 품목의 가격까지 정부가 완벽하게 챙기기를 요구하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목표였던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는 정부가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온정주의(paternalism)라는 비판을 받았다.

물가는 그 자체가 정치이기도 하다. 장바구니 앞에서 국민이 느끼는 난감함을 정치가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물가를 지나치게 정치 공방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어딘가에서 꼭 동티가 난다. 무리하게 시장에 개입하는 정책이 나오고 결국 더 중요한 곳에 써야 할 국민 세금을 임시변통에 쓰게 된다. 지나친 ‘물가의 정치화’를 경계해야 할 이유다.

‘물가와의 전쟁’을 벌였던 이명박 정부 시절 얘기다. 2010년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에 야당 의원이 배추를 흔들며 소리쳤다. “이게 1만5000원짜리 배추입니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다음날 신문에 이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그 해 국감을 관료들은 ‘배추 국감’으로만 기억한다. 후유증은 작지 않았다. 그 후 정부는 농수산물 수급 안정에 1000억원을 더 쓰기로 결정했다. 급등락을 반복하는 농산물 시장의 수급 안정에 정부가 개입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분명한 건, 신선식품 물가 급등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정치권 탓에 국민이 값비싼 정책비용을 치르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정부·여당은 농축산물 가격 안정을 위해 기존 434억원에 추가로 15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며칠 전 논란이 됐던 윤석열 대통령의 ‘875원 대파’는 이런 재정 지원과 하나로마트 자체 할인의 산물이다. 그냥 “정부 지원에 가격이 떨어졌네”라고 했으면 정책 홍보라도 됐을 텐데, “합리적 가격”이라고 언급하는 바람에 시끄러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야당 의원들을 대파를 들고 총선 유세장을 누비고 있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기에 농산물 가격보조 정책은 어느 정부건 외면하기 힘들다. 하지만 재정 투입을 무한정 계속하기는 힘들다. 정책 우선순위가 높은 다른 사업에 쓸 수 있는 돈이다. 시장가격을 보조하는 대신, 필요하면 취약층에만 농산물 쿠폰을 지원하는 방안도 있다.

국민의 합리적 소비는 고물가를 견디는 힘이 된다. 2010년 배추파동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식탁에 올리라는 지시로 입방아에 올랐다. 양배추값도 배추값 못지않게 비싸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았지만 저렴한 대체재를 소비하자는 취지 자체는 틀린 게 없다.

정부도 임기응변식 가격 보조를 넘어서 기후 변화와 고령화에 따른 공급 축소를 비롯한 농산물 생산·유통 문제를 개선하는 중장기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사과 수입 금지가 병해충을 막기 위한 검역 문제라고 정부는 설명하지만 생산농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없지 않을 것이다. 농민 보호와 소비자 보호 사이에서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기를 바란다. 소수 이익집단의 강한 반발에 밀려 국민 전체의 큰 이익이 훼손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의대 증원도, 사과 수입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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