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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재의 시선

이건희의 호통과 아오지탄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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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상재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부디렉터
이상재 경제산업 부디렉터

이상재 경제산업 부디렉터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는 부지가 289만m²(약 87만 평)로, 서울 여의도 면적과 맞먹는다. 가장 최신인 P4라인은 건물 공사비만 10조원 이상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말과 야간에도 공사를 밀어붙이는 속도전으로 외관은 마무리 단계지만, 생산설비는 아직 들어가지 않고 있다. 삼성 관계자에 따르면 당초 파운드리 설비를 반입할 계획이었으나 이달 초 “시황을 봐가면서 하반기에 재검토하자. 당장은 비워두자”고 결론 났다고 한다.

돈 되는 HBM 사업에서 성과 미진
이건희 회장 격노한 수율이 관건
초격차보다 ‘추격자 초심’ 다져야

지구에서 가장 크고 비싼 반도체 공장을 놀리는 셈이지만, 사실 이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이기도 하다. 요즘 시장에서 가장 돈 되는 반도체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관련 시설이 들어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HBM은 올해 전체 D램 매출 중 20.1%, 금액으론 22조원을 웃돌 것이란 전망이다(트렌드포스). 인공지능(AI) 열풍 속에서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려면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이 필수다.

삼성은 HBM에서 SK하이닉스에 밀린다고 평가받는다. 하이닉스가 만든 HBM3(4세대)은 전 세계 AI 칩 시장의 90%를 장악한 ‘신(新)반도체 황제’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된다. 삼성은 현재 양산 검증을 받는 중이다.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20일(한국시간) “삼성전자의 HBM을 테스트하고 있으며 기대감이 크다”고 말하자 삼성전자 주가가 이틀 연속 상승했다. ‘메모리 지존’으로선 웃픈 현실이지만, 아무튼 당장은 새 공장을 비워두는 게 현명해 보인다.

수율(收率·제조된 칩 가운데 정상품 비율) 확보가 숙제다. 반도체는 수율이 높아야 생산단가가 낮아지고, 수익이 커진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업계 전문가를 인용해 “HBM3의 수율은 삼성전자가 10~20%, SK하이닉스는 60~70%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는다. 하이닉스가 지난해 4분기 주요 메모리 업체 중 가장 먼저 흑자 전환한 배경이 고부가 HBM의 선전, 구체적으로는 수율 안정화 덕분이다.

이 대목에서 ‘이건희의 호통’이 소환된다. 2007년 7월 수원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 행사장.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얼마나 방심했기에 이 지경까지 됐느냐”며 수뇌부를 강도 높게 질책했다. 황창규 당시 반도체총괄 사장으로부터 “공정 전환 과정에서 수율이 하이닉스에 일시적으로 뒤졌다”고 보고받은 직후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 회장은 10분 넘게 목소리를 높였다. 수율에서 1등을 내줘선 안 된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후 삼성 반도체에선 조직 정비와 경영진단(감사), 임원 인사가 속사포처럼 이어졌다.〈중앙SUNDAY 2007년 9월 30일 자〉

SK하이닉스도 HBM 사업에서 쓴맛을 본 경험이 있다. 2016년 내놓은 HBM2(2세대)가 실패했다. 고객사가 원하는 성능과 납기를 맞추지 못했다. 이후 사내에서 HBM 부서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 HBM개발팀은 ‘아오지탄광’으로 불렸다. 하지만 교훈은 분명했다. 고객이 원하는 성능과 일정을 맞추지 못하면 사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업(業)의 본질을 체득했다. 투자는 계속 이어졌다.”(전준현 SK하이닉스 부사장, 지난해 10월 중앙일보 인터뷰)

이즈음 영입된 삼성전자 ‘온양 맨’들의 역할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반도체 후공정을 담당하는 연구 인력으로, 삼성에선 푸대접받고 있었다. 온양 공장은 1990년대 말부터 20년 가까이 분사·매각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가 하이닉스로 옮기면서 2010년대 후공정 기술 업그레이드에 ‘거름’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미국판 굴기(屈起)부터 일본의 권토중래, 인텔의 영토 확장 등 반도체 패권 전쟁을 둘러싼 변수가 다양하다. 이런 외부 변수를 생략하고, 지금 삼성에 필요한 건 무엇일까. 먼저 이건희의 호통, 즉 틈날 때마다 강조했던 위기의식을 되새겨야 한다. 초격차가 아니라 추격자로서 초심이다. 아오지탄광 행(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결기도 살려야 한다. 이에 걸맞은 인사보상 시스템도 정비해야 할 것이다.

마침 삼성은 ‘판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사장)은 20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HBM이 필요 없는 AI 가속기(AI 학습·추론에 특화한 반도체 패키지) ‘마하-1’을 연말까지 개발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엔비디아가 장악한 그 시장이다. 회심의 반격 카드인데, 일단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 삼성전자 간부가 전한 이 말이 여전히 귓가에 남는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귀가 따갑게 들었다. 정작 실패하면, 아니 성과에 미치지 못하면 임원은 재계약이 안 되고, 팀은 해체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