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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서로 밀쳐내는 고슴도치 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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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인간다움을 묻다  ② 권수영 교수

권수영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 상담코칭학과 교수는 “나를 돌아보는 것”을 인문학적 공동체 문화 회복의 첫 걸음으로 봤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권수영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 상담코칭학과 교수는 “나를 돌아보는 것”을 인문학적 공동체 문화 회복의 첫 걸음으로 봤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22년 ‘보다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BLI)에서 한국의 사회적 연결 지표는 41개국 중 38위였다. 생활·교육 수준은 높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응답은 80%로 OECD 평균 91%를 밑돌았다. 어쩌다 효와 예,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해온 우리의 관계 지표가 최하위 수준으로 추락한 걸까.

지난 6일 만난 ‘관계 전문가’ 권수영(57)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코칭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원래 관계를 중시했는데, SNS(소셜미디어) 등으로 인해 관계가 양적으로는 팽창했지만, 질적으로는 무너졌다”며 그 요인으로 공동체 문화 붕괴, 사회적 기준에 지나치게 엄격한 ‘빡빡한 문화’(tight culture)를 들었다. 한국상담진흥협회 이사장 등을 지낸 그는 저서와 강연을 통해 “한국인의 분노에 감춰진 진짜 감정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권 교수는 한국의 관계망 붕괴는 코로나19 전부터 나타났다고 했다. 그는 “마을 문화가 사라진 게 상징적이다. 공동체 붕괴는 정신 건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며 ‘인성교육진흥법’이 제정된 2015년을 주목했다. 그는 “당시 층간소음을 이유로 이웃에게 칼부림하는 등 사회갈등과 분노범죄 수위가 높아졌고, 공교육만으로 학교폭력을 막을 수 없어 인성교육을 의무화했다”고 짚었다. 그는 “서로의 가시에 찔려 점점 경계하고 밀어내는 고슴도치처럼, 상처받지 않으려고 이념·성별·세대별로 나뉘면서 관계의 질이 떨어지고 소외감이 커졌다”고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 ‘고슴도치 딜레마’에 빗대 최근의 분노 현상을 설명했다.

권 교수는 SNS에 유행했던 ‘혼밥족’ 인증샷을 예로 들었는데,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없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혼자 밥 먹는 셀카를 찍어 올린 게 시작”이라며 “(인간은) 고통까지 연대할 만큼 소외되는 걸 두려워한다. 그러다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크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해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경고했다. 그는 늘어난 고독사도 사회 관계망이 붕괴한 사례로 꼽았는데, “50대 고독사가 70~80대보다 많은 건, 사회 기준에 맞춰 살다가 퇴직 후 가정·사회 등에서 설 자리를 못 찾고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설명했다.

해법은 없을까. 권 교수는 “빡빡한 문화를 바꾸려면 인문학적 사고가 중요하다. 인문학의 기본은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아는 것”이라며 “남이 가르쳐준 해답을 벗어나 나만의 고유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빡빡한 문화’ 순위에서 모로코·인도네시아·이집트 등 이슬람 국가에 이어 65개국 중 9위다. 그는 이어 “오늘 얼마나 즐거웠는지, 어려울 때 누가 옆에 있다고 느꼈는지 돌아보면 된다”며 “가족·친구와 더 공감할 수 있다면 사회적 연결 지표도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 내 세대 간 장벽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권 교수는 “관계도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아이가 독립된 자아라는 걸 인정해야지 섣불리 침범하면 방어벽만 높아진다”며 “대신 ‘힘들 때 원하면 대화 상대가 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주라”고 권했다. 이어 “지금 50~60대는 부모에 효도한 마지막 세대다. 대접받길 원할수록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며 “그간 남을 위해 살았다면 나이 들수록 나 자신을 성숙하게 가꾸는 일에 집중하라”고 충고했다.

권 교수는 이런 ‘관계’ 문제 해결에 있어 정부의 인문학 관련 정책이 의미 있다고 짚었다. 외로움 상담센터, 인문 프로젝트 지원, 생활 속 인문강좌 확대 등이다. 지난해 12월 ‘2023 연결사회 포럼’에선 서울 방학동 50세 이상 주민들의 서로 돌봄 공동체 ‘방학서클’의 실천 사례, 고립·은둔 청년을 위한 지원사업 사례 등이 소개됐다.

권 교수는 “인문 진흥 운동은 마을 중심으로 하는 게 좋다”며 스웨덴 스톡홀름의 사립 대안학교 ‘프리슈셋(Fryshuset)’을 소개했다. 지역사회 자원을 활용해 학교 밖 청소년을 다양한 교육·문화·복지 서비스로 품은 마을 프로젝트다. 그는 세월호·이태원 참사 등과 관련해서도 “사회 관계망이 잘 구축되면, 재난 생존자가 비슷한 고통을 받은 사람에게 힘을 주고 함께 치유할 수 있게 되는 ‘외상 후 성장’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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