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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세계경제전망

마이너스 금리 해제해도, 완화 기조는 유지할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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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통화정책 전환 나선 일본은행

하현옥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저물가의 족쇄에 갇혀 전례 없는 금융완화 정책을 펼쳤던 일본은행(BOJ)이 통화정책 정상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번 달 금융정책결정회의(18~19일)에서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할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금리 인상에 나서면 2007년 이후 17년 만에 금리를 올리는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 해제는 2016년 1월 도입 이후 8년여 만이다.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BOJ 총재는 지난 7일 참의원(상원) 예산위원회에서 “물가 목표 실현을 전망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마이너스 금리 등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의 수정을 검토해갈 것”이라고 밝혔다. 수입 물가 상승 등으로 저물가 탈출을 위한 길은 열렸다. 지난해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CPI·신선식품 제외)는 3.1%(전년 대비) 상승했다. 상승 폭으로는 1982년 이후 41년 만에 가장 컸다. 인플레이션 기조는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 CPI 지수(전년동기대비)도 2.0% 뛰었다. BOJ의 물가 목표치(2.0%)에 부합하는 흐름이다.

비전통적 통화정책 펼쳤던 BOJ
유동성 공급 정책 되감기 시작
금융시장 왜곡 부메랑 우려에
과감한 긴축으로 가진 않을 듯

대폭 오른 임금, 금융 완화 힘 실어

마지막 퍼즐도 맞춰지고 있다. 일본 대기업이 큰 폭의 임금 인상에 나서며 통화정책 정상화에 탄력이 붙었다. 일본 최대 노조 조직인 렌고(連合·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지난 15일 발표한 1차 노사교섭의 평균 임금인상률은 5.28%다. 5%대 임금 인상률은 1991년(5.66%) 이후 33년 만이다. 기업은 노조의 요구를 속속 수용하고 있다. 토요타자동차는 1999년 이후 25년 새 가장 큰 폭(직종·계급별 최대 월 2만8440엔)으로 임금을 올리기로 했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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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인상은 금리 인상의 전제 조건인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의 중요한 요소다. 엔저와 수입 물가 상승이 띄운 인플레 흐름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임금발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임금과 물가 상승의 선순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블룸버그는 “토요타가 일본 대기업 임금 추세의 기준점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이번 인상은 BOJ가 전례 없는 금융 완화 정책을 단계적으로 폐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4월 취임한 우에다 총재는 마이너스 금리 탈출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을 해왔다. 지난해 7월과 10월 장기금리의 상단을 높이는 수익률곡선제어(YCC) 완화 정책이 그 신호탄이었다. 마이너스 금리 해제로 BOJ가 그동안 풀어온 각종 통화정책 되감기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정책 도입과 시행의 역순으로 ‘YCC 완화→마이너스 금리 종료 및 YCC 폐기→자산 매입 축소’의 정상화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디플레 탈출 위한 ‘구로다 바주카포’

일본은 각종 통화정책의 시험장이었다.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저성장과 저물가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금리 인하와 제로금리 등 전통적 통화 정책이 바닥나자, BOJ는 양적 완화(QE)와 마이너스 금리, YCC 등을 통한 장단기 금리 관리 등 비전통적 통화 수단을 도입했다. 2001년 3월 일본 정부가 디플레이션을 선언한 뒤 BOJ는 저물가와의 길고도 지루하며 험난한 전쟁에 돌입했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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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J의 통화정책 실험은 아베노믹스와 함께 본격화했다.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총재는 유동성을 쏟아부었다. ‘구로다 바주카포’의 등장이다. 구로다가 가장 먼저 도입한 것은 2013년 4월 개시한 양적·질적 통화 완화(QQE) 정책이다. 통화 정책 수단을 콜금리에서 본원통화로 변경하고, 본원통화를 2년 안에 2배 늘려 인플레이션 2%를 달성하겠다는 목표였다.

이를 위해 국채 매입을 통해 본원통화를 연간 60조~80조 엔씩 늘리고, 장기 국채보유 잔액을 연간 50조~80조 엔씩 늘려 시장금리 하락을 유도했다. 상장지수펀드(ETF)와 리츠(REITs)의 대규모 매입을 통해 부동산과 주식에 간접 투자했다. ETF와 리츠 등 매입 자산의 질적 측면에서 완화한다는 의미로 이를 질적 완화라 칭했다.

유동성의 수도꼭지를 제대로 열었지만, 불황과 저물가는 난제였다. 새로운 충격 요법을 고민하던 구로다가 꺼내 든 카드가 마이너스 금리다. 2016년 1월 BOJ는 시중은행이 BOJ에 예치하는 지급준비금에 부과하는 단기정책 금리를 -0.1%로 끌어내렸다. 마이너스 금리에서는 예금을 맡길수록 손해다 보니 민간은행은 손실을 피하기 위해 지급준비금을 헐어서 대출이나 유가증권 등에 투자를 늘리는 유인이 생기게 된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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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J의 통화정책 실험의 마지막은 2016년 9월 도입한 YCC다. 단기금리(-0.1%)를 마이너스로 두면서 장기금리(10년물 국채 금리)를 0%로 유지하도록, 장기금리인 10년 국채 금리가 상승해 상한선을 넘어서면 국채를 사들여 국채 가격을 높여 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BOJ가 국채 매입의 큰 손이 돼 국내 유동성을 조절하며 물가 목표치 달성까지 본원통화를 늘려왔다.

오랫동안 꿈쩍 않던 BOJ가 통화정책 정상화를 향한 의지를 드러낸 건 2022년 12월부터다. 장기금리인 10년물 국채 금리 변동 폭을 0.5%로 확대했다. 지난해 7월에는 10년 국채 금리 상단을 1.0%로 높였고, 지난해 10월에는 10년물 금리 상단 1.0%를 목표치로 바꾸며 지정 가격 국채 매입을 통한 장기금리의 엄격한 통제를 포기했다. BOJ가 사실상 장기금리 인상을 허용한 것으로, 시장은 통화정책 정상화를 위한 단계로 평가했다.

BOJ가 마이너스 금리 해제와 YCC 폐기에 나서겠지만, 곧바로 통화긴축으로 이어지진 않을 전망이다. 우에다 총재는 중의원 회의에서 “마이너스 금리 해제 후에도 완화적인 금융 환경이 당분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경제성장률이 확연하게 개선되지 않는 데다 소비 회복도 쉽지 않을 수 있어서다. 지지통신 등에 따르면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하더라도 국채 매입은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통화정책 정상화 자체도 만만치 않다. BOJ의 물량 공세로 채권과 주식 시장에 누적된 왜곡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다. 그중 하나가 ETF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2월 말 현재 BOJ가 보유한 ETF의 시가총액은 71조 엔으로 장부가보다 34조 엔 높다고 보도했다. 닛케이 지수 상승으로 대박을 맞았지만, 섣불리 수익 실현에 나설 수는 없다. BOJ가 ETF를 내다 팔면 주가 폭락을 피할 수 없다. BOJ의 유동성에 취해있던 채권 시장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BOJ는 현재 매달 7조5000억 엔 규모의 일본 국채를 사들이고 있다. 연간 순매수 규모는 17조 엔이다. 시장의 큰손이었던 BOJ의 국채 매입 규모가 줄면 중장기 금리 인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BOJ, 국채 발행 잔액의 54% 보유

시장 금리가 오르면 BOJ도 충격을 피할 수 없다. BOJ의 당좌예금 잔고는 518조 엔에 이른다. 금리가 뛰면 이자 지급액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BOJ의 국채 보유 잔액은 전체 발행 잔액의 54%에 달한다. 마이너스 금리 해제와 국채 매입 중단 등으로 국채 금리가 오르면(국채 가격 하락) 막대한 평가 손실을 입게 된다. 지난해 4월 일본경제연구센터의 추산에 따르면 단기금리가 2%, 장기금리가 3%까지 오르면 BOJ는 12조 엔의 적자를 기록하고 자본잠식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됐다.

일본 정부 지출의 국채 의존도가 30%를 넘는 것을 감안하면 보유 잔액을 빨리 줄일 수도 없다. 이승훈 메리츠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 채무가 260%에 달하는 환경에서 장기금리 1%라는 기준을 단기간에 조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인플레이션이 2%를 넘고 명목 GDP가 매년 3~4% 늘어날 수 있다는 환경이 조성되고 믿음이 생겨야 1% 이상으로 시중 금리 상승을 본격적으로 용인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통화정책 정상화 여파는 국제 금융시장에도 미칠 전망이다. 일본의 시장 금리가 상승하면 일본 국채 투자가 늘어날 수 있다. 해외로 나갔던 자금이 돌아오면서 엔화 가치는 뛰고, 미국 국채 수요는 줄어들 수 있다. 다만 BOJ가 통화정책 전환과 관련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관측에 시장은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블룸버그는 “투자자들이 BOJ의 결정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