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협객은 백성에 헌신” 진융 탄생 100년, 中 재조명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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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강남의 600여년 명문가였던 하이닝 사씨인 사승(査昇)에게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하사한 편액 ‘담원당’. 아홉마리 용으로 편액을 장식했다. 아래로 “당송이래거족, 강남유수인가(唐宋以來巨族 江南有數人家)” 강희제 친필 대련이 보인다. 신경진 특파원

강남의 600여년 명문가였던 하이닝 사씨인 사승(査昇)에게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하사한 편액 ‘담원당’. 아홉마리 용으로 편액을 장식했다. 아래로 “당송이래거족, 강남유수인가(唐宋以來巨族 江南有數人家)” 강희제 친필 대련이 보인다. 신경진 특파원

“의협을 생각하는 큰 사람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俠之大者 爲國爲民).”

16일 중국 저장성 하이닝(海寧)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나서자 마자 위의 여덟 글자가 곳곳에 나부꼈다. 하이닝은 필명 ‘진융(金庸·김용)’으로 널리 알려진 홍콩의 무협소설가 겸 신문인 자양융(査良鏞·1924~2018)의 고향이다.

해당 문구는 진융의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몽골족의 침입에 맞선 협객들의 각오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근 중국에선 애국주의 경향과 맞물려 강조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20년부터 즐겨쓰는 “나라를 생각하는 큰 사람(國之大者·국지대자)” 발언과 유사해서다. 지난 10일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진융이 중국 내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난 16일 무협소설가 진융의 고향인 하이닝 위안화진 입구에 “의협을 생각하는 큰 사람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俠之大者 爲國爲民)“는 문구 옆으로 시진핑 문화사상 선전문이 보인다. 신경진 특파원

지난 16일 무협소설가 진융의 고향인 하이닝 위안화진 입구에 “의협을 생각하는 큰 사람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俠之大者 爲國爲民)“는 문구 옆으로 시진핑 문화사상 선전문이 보인다. 신경진 특파원

이날 찾은 진융의 생가에선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친필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았다. 강희제는 참모였던 진융의 선조 사승(査昇)에 용 아홉 마리와 친필 '담원당(澹遠堂)'이란 글자가 담긴 편액을 하사했다. 생가 내부의 방인 담원당에 걸린 “당송이래거족, 강남유수인가(唐宋以來巨族 江南有數人家)” 이란 문구 역시 강희제의 친필이다. 진융이 속한 하이닝 자씨는 원~청대 600여년간 과거급제자를 133명이나 배출한 강남의 명문가이다. 지난 12일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관한 진융 생가엔 100년 전 진융이 태어났을 때 썼다는 목각 침대도 전시돼 있었다.

16일 하이닝 시내 옛 공장터에서 열리고 있는 진융 100년 기념전시회의 항룡십팔장 체험 코너. 하이닝=프리랜서 장창관

16일 하이닝 시내 옛 공장터에서 열리고 있는 진융 100년 기념전시회의 입구. 신경진 특파원
지난 16일 찾아간 저장성 하이닝의 진융 옛집 입구. 신경진 특파원
무협소설가 진융의 고향인 하이닝 위안화진 입구. 진융의 고향이라는 소개 글자가 선명하다. 신경진 특파원
16일 한 초등생이 저장성 하이닝의 진융 옛집 전시실을 찾아 취재에 응하고 있다. 하이닝=프리랜서 장창관
1952년 영국 종군기자 레지날드 톰슨의 취재기 『‘CRY KOREA』를 락의(樂宜)라는 필명으로 번역한 역서 제목은 항미원조 아닌 『조선혈전내막』이었다. 신경진 특파원

1952년 영국 종군기자 레지날드 톰슨의 취재기 『‘CRY KOREA』를 락의(樂宜)라는 필명으로 번역한 역서 제목은 항미원조 아닌 『조선혈전내막』이었다. 신경진 특파원

“진융은 왼손으로는 사설을, 오른손으로는 소설을 썼다.” 현장의 안내원은 “진융은 불편부당하게 민생을 챙기는 사설을 쓴 소설계의 신필(神筆)이자 언론계의 건필(健筆)”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생애를 담은 전시실에는 총 25개의 필명이 소개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번역서도 눈에 띄었다. 1952년 영국 종군기자 레지날드 톰슨의 취재기 『‘CRY KOREA』를 락의(樂宜)라는 필명으로 번역한 제목은 『조선혈전내막』이었다. 1973년 대만을 직접 취재한 진융이 펴낸 취재기의 필명은 황애화(黃愛華). 안내원은 “황인종이며, 중화를 사랑하는 필자라는 표시”라고 설명했다. 1948년 홍콩으로 이주한 진융은 1992년을 시작으로 생전에 하이닝을 여섯 차례 찾았다.

12살 초등학생 관람객은 “왕실과 신분이 바뀐 줄거리의 『서검은구록』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며 “진융처럼 세계적인 소설가가 꿈”이라고 말했다. 노란색 안전모를 쓴 노동자,노부부와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관람객들도 있었다.

하이닝 시내의 옛 공장 터에서는 “적자심 가향정(赤子心 家鄕情)”을 주제로 진융 100년 기념전시회가 별도로 열리고 있었다. 한글판 사조영웅전 책자 등 각국 언어의 번역 서적과 광둥어·민남어·쓰촨어 등 중국 각지의 사투리로 낭독한 오디오북도 서비스되고 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무술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을 따라 하도록 안내한 뒤 촬영해 만화 캐릭터로 재현하는 체험형 서비스도 독특했다. 진융의 무협소설이 영화와 드라마, 게임을 넘어 가상체험으로 넘어갈 여지를 보여줬다.

하이닝의 전시실 두 곳 어디에도 지난 1951년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당한 진융의 부친 자수칭(査樞卿) 소개는 없었다. 1981년 7월 진융을 만난 덩샤오핑은 부친의 일을 사과했다고 전해진다. 1985년 하이닝 인민법원은 1951년 판결이 잘못됐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중국 SNS에선 진융을 재평가하는 열기가 뜨겁다. 중국판 X(옛 트위터)인 웨이보에는 관련 해시태그 #진융 탄신 100주년, #진융 작품의 가장 참담한 주인공이 각각 6800만 건과 4500만 건의 클릭을 기록 중이다. 시사지 ‘환구인물’과 ‘신주간’은 진융을 재조명한 특집판을 출판하며 고인을 기렸다. 진융 소설에서 활약하는 정(情)과 협(俠)을 겸비한 캐릭터를 애국심보다 강조하며 최근 중국인의 심리 상태를 반영했다.

생가 근처 첸탄강(錢塘江)의 조수 해일을 보며 강호를 구상했다는 진융. 그의 고향 하이닝을 떠나면서 안내원이 소개한 진융의 묘지명이 귓가에 맴돌았다. “여기 한 인간이 누워 있다. 20세기와 21세기에 열 몇 편의 무협소설을 썼고, 이들 소설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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