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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시각각

사법주권 수호의 허무한 결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32개국 128만 명의 회원이 36만 건의 아동 성착취물을 거래한 다크웹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의 꼬리를 처음 잡은 것은 2015년 영국이었다. 이후 각국 수사기관의 공조로 300여 명의 공범과 이용자가 체포됐다. 메인 서버 장소를 한국의 충남 당진으로 특정한 것은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이었다. 2018년 5월 손정우를 체포한 것은 한국 경찰이지만 사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처벌은 더 대조됐다. 영국의 영상 제작자는 22년, 미국의 사이트 공동운영자는 15년, 영상을 내려받은 사람도 5년형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주범은 한국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비트코인을 이용한 돈세탁은 기소도 안 됐다. 그런데 미국 사법당국이 이 틈을 파고들어 손정우의 형기 만료 직전 범죄인 인도 청구를 했다. 범죄인 인도 조약에 따라 한국에서 처벌받지 않은 죄는 인도 대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알린 여성 활동가들이 2020년 7월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사법당국을 비판하고 있다. 뉴스1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알린 여성 활동가들이 2020년 7월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사법당국을 비판하고 있다. 뉴스1

 손정우 측은 아버지가 아들을 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검찰은 재빨리 기소했고, 법원은 두 달 만에 인도 불허 결정을 내렸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한국인을 한국에서 처벌하고야 말겠다는 ‘사법주권 수호’ 의지의 표현이었다. 문제는 의지를 뒷받침한 관행과 법 제도가 허술했다는 점이다. 미국으로 인도됐으면 20년형 이상을 선고받았을 손정우에 대해 한국 법원이 선고할 수 있는 형량은 고작 징역 2년뿐이었다. 2022년 7월 법정구속된 그는 넉 달 뒤면 출소한다.

아동 성착취물 운영 주범 손정우
미 인도 거절 후 고작 2년형 추가
권도형 데려와 엄벌할 수 있겠나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53조원의 손실을 입힌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송환을 둘러싼 한·미 사법당국의 경쟁은 4년 전 모습의 데자뷔 같다. 잠적했던 권씨가 지난해 3월 23일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되자 미국 대사관은 3월 27일 신병 인도를 요청하는 서한을 현지 정부에 공식 제출했다. 한국 정부의 서한은 28일 접수됐지만, 미국보다 사흘 앞선 24일 영문 e메일 요청서를 보냈다. 미국의 서류가 단순 구금 요청이었지만 우리는 구체적인 인도 요청 서류가 첨부됐다. 이런 탓에 인도 재판은 줄곧 엎치락뒤치락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2월까지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은 세 차례 미국으로의 송환 결정을 했다. 그때마다 몬테네그로 항소법원이 파기환송했다. 결국 미국 송환을 고집하던 포드고리차 고법도 지난 8일 한국으로의 송환을 결정했다.

지난해 5월 11일(현지시간)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 권도형(32) 테라폼랩스 대표가 몬테네그로 수도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현지 법원은 권씨를 한국과 미국 중 어느쪽으로 보낼 것인지를 두고 여러차례 결정과 번복을 거듭한 끝에 올 3월 한국 송환을 결정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5월 11일(현지시간)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 권도형(32) 테라폼랩스 대표가 몬테네그로 수도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현지 법원은 권씨를 한국과 미국 중 어느쪽으로 보낼 것인지를 두고 여러차례 결정과 번복을 거듭한 끝에 올 3월 한국 송환을 결정했다. 연합뉴스

 4년 전 손정우 송환 사건 담당 재판부는 결정문에 송환 불허 사유를 이렇게 적었다. “네트워크 기반으로 이뤄진 이 사건은 범죄자 관할국이 어느 한 곳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인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동음란물 관련 범죄의 예방과 억제 측면에서 대한민국에 이익이 된다.” 국내 피해자가 많으니 한국에서 처벌해 사법주권을 실현하자는 것인데, 지금의 권도형 사건과 판박이다.
 사법당국과 달리 피해자들은 한국에서 재판받는 것을 우려한다. 제대로 처벌받을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여러 죄를 한꺼번에 저지른 경우 미국은 각 죄에 대한 형을 합산하는 반면, 우리는 가장 무거운 죄를 기준으로 그 절반만 가중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사기범이 100년 이상 형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역사상 43년형(김재현 전 옵티머스 펀드 대표)이 최대였다. 한국 정부와 사법부는 아직도 가상화폐를 증권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공식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 경우 사기 혐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테라·루나를 상장하기 전에 권씨가 직접 피해자를 속여 판 금액(프리 세일)만 피해 규모로 인정될 수도 있다.
 더구나 법관 기피, 공판 연기, 위헌법률 심판, 보석 신청 등 최근 한국 법정에서 유행하는 다양한 재판 지연 전술이 등장할 수도 있다. 1년쯤 지나면 보석이 불가피해지고,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은 한정 없이 늘어질 수도 있다.
 오는 23일이면 권씨의 여권법 위반 혐의에 대한 구금 시한이 끝난다. 한국 송환이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수영장의 물은 빠지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수영복을 제대로 입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