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 잘 맞히는 ‘구리박사’…상승 가리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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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기 훈풍 신호

글로벌 경제의 주요 선행지표 중 하나인 구리 가격이 1년여 만에 최고치로 올랐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선 앞으로 세계 경기의 회복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키우고 있다.

17일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 따르면 지난 15일 구리 선물 최근월물 가격이 1파운드당 4.1245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1개월여 전인 지난달 9일(3.6815달러)보다 12%가량 오른 수치다. 1년여 전인 지난해 3월 1일(4.1680달러) 이후 최고치이기도 하다.

구릿값은 세계적으로 ‘닥터 코퍼(Dr. Copper, 구리 박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구리 가격은 경기 변동에 민감한데, 글로벌 경기에 선행적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구리가 제조업·건설업 전반에 재료로 사용되는 만큼, 수요 확대에 따라 구리 가격이 오르면 제조업·건설업 활황 등으로 경기가 상승할 것이라는 식이다. 원유나 금과 다르게 지정학적·정치적 영향을 덜 받는 점도 경기 선행지표로서의 신뢰도를 높인다.

최근 구리 가격이 오르는 건 수요가 커져서다.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보급이 확대되는 가운데 이를 활용하기 위해 구리가 많이 들어가는 전력 공급망 구축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라이스태드에너지는 지난달 15일 보도자료를 내고 “2030년까지 1800만㎞의 전력망을 신설해야 하는데, 구리가 3000만t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전기 먹는 하마’로 알려진 인공지능(AI) 보급이 급격히 확산하는 점도 구리로 된 전력망 수요를 키우는 요소다.

또한 구리가 많이 들어가는 전기차 시장이 확대되는 것도 구리 수요 확대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공급 부족 현상도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우선 세계의 주요 구리 광산이 잇따라 폐쇄하고 있다. 파나마에선 지난해 12월 자국 최대 구리 광산(코브레)을 폐쇄하기로 했다. 같은 해 10월엔 호주에서 두 번째로 큰 구리 광산(아이사)이 안전성 문제 등 탓에 문을 닫기로 했다.

구리 가격은 내년까지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의 나타샤 카네바 글로벌 원자재 전략책임자는 지난 13일(현지시각) 미국 경제전문 매체 블룸버그를 통해 “2025년 초 구리 가격이 1t당 1만 달러(1파운드당 4.53달러)까지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씨티은행은 지난해 12월 보고서에서 “구릿값이 2025년에 사상 최고치 1t당 1만5000달러(1파운드당 6.8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봤다.

앞서 구릿값은 1996년 말 아시아 외환 위기, 2000년대 중반 IT버블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등에 앞서 하락하며 선행지표로 신뢰를 얻었다. 특히 글로벌 금융 위기 와중이던 2008년 12월엔 폭락했던 구리 가격이 상승세로 돌아서고 1년가량 후부터 세계 각국의 경기가 회복하면서 ‘구리 박사’의 명성을 굳혔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생산자물가 상승→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현재 국내물가는 하락세이기 때문에 수출 확대에 따른 긍정적 영향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2011년 2월엔 당시 기준으로 사상 최대치를 나타냈는데, 세계 경제는 남유럽 재정위기 우려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 때문에 그해 말 프랑스 투자은행 소시에테제네랄(SG)은 “구리 박사는 죽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번 구릿값 상승도 공급 부족의 요인이 크기 때문에 향후 경기를 낙관하기 힘들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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