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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엄마의 꽃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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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호 31면

‘석작’ 시리즈, 2019년 ⓒ 한상재

‘석작’ 시리즈, 2019년 ⓒ 한상재

석작. 한 세대 전만 해도 서민들 가정에서 흔히 쓰이던 물건인데 이제는 그 이름조차 아는 이가 드물다. 나무로 만든 궤나 농이 발달하기 이전부터 생활용품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던 바구니 함이다. 고리라고 하면 좀 더 익숙할까. 주로 버드나무가지로 엮어서 버들고리란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몇 해 전 사진가 한상재는 노모가 홀로 지내시던 친정집에서 석작 하나를 발견했다. 당시 아흔을 넘긴 어머니는 병원 침대에 누워,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가끔씩 빈집에 들러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어머니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초조했다. 딸인 자신이 엄마의 물건을 챙기고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25년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다 퇴직하고, 갓 카메라를 손에 든 때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진으로 뭔가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석작을 열기 전까지는.

낡은 석작 안에는 어머니의 세월이 응축되어 담겨 있었다. 손 글씨로 ‘미싱’이라고 써 붙인 재봉틀기름에서부터 쓰다 남은 공책으로 만든 가계부와 돌아가신 아버지의 은수저, 브로치 같은 작은 장신구들까지. 쓰임이 다했는데도 버리지 않고 석작 안에 간직했으니, 어머니가 오래 사랑했던 물건들이다. 군데군데 좀 먹은 빛바랜 한복 치마에 남아있는 고운 산호색은 그런 엄마의 꽃다운 시간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는 이 사물들을 석작 안에 담아 고이 간직하고 싶어했던 엄마의 마음을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흐릿한 기억을 되살려서, 각각의 사물에 얽힌 사연들을 듣고 받아 적었다. 산호색 비단치마를 입었을 때 엄마는 멋쟁이 소리를 들었노라고 했다. 색 바랜 치마 위에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 꽃송이들을 올려 꽃무늬를 만들고 사진에 담았다. 엄마의 아름다운 시절에 바치는 딸의 헌사였다.

이듬해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사진 시리즈 ‘석작’은 남아, 현재 ‘서울아카이브’ 작업의 일환으로 서울의 오래된 거리들을 기록하고 있는 사진가 한상재를 대표한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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