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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철펜으로 꾸역꾸역…난 오늘도 그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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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호 19면

세 번째 펜화 개인전 여는 안충기 작가

나무야 나무야, 30.5x45.5㎝, 종이에 먹펜(2023)

나무야 나무야, 30.5x45.5㎝, 종이에 먹펜(2023)

“꾸역꾸역. 격이 떨어지고 비루한 느낌이지만 나는 이 말이 좋다. 오늘도 나는 그린다. 꾸역꾸역.”

0.1㎜ 철펜과 먹물로 세상을 담아내는 안충기 작가의 말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도전을 시작하지만 종내 결실을 맺는 사람은 흔치 않다. 중년의 나이에 시작한 도전이라면 더욱 그렇다. 격 떨어지고 비루해 보이지만 ‘꾸역꾸역’이라는 단어가 좋다는 안 작가의 말이 가슴이 꽂히는 이유다.

안충기 작가는 중앙일보 편집기자이자 아트전문기자다. 2008년 우연히 시작한 펜화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지난 세월이 16년째. 그동안 ‘비행산수:하늘에서 본 우리 땅’(2020년), ‘안충기 펜화 서울’(2023년)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펜화집 『비행산수-하늘에서 본 국토』 『처음 만나는 청와대』도 냈다.

정체 탄로 23x30.5㎝, 종이에 먹펜(2024)

정체 탄로 23x30.5㎝, 종이에 먹펜(2024)

안 작가는 “우연과 우연이 만난 필연”이라고 했다. 충청도 산골의 까까머리 소년에게 그림은 친구였고, 사회과부도는 싫증나지 않는 장난감이었다. 도화지에 수채화 물감으로 대한민국전도와 세계전도를 그려서 벽에 붙이고 밤낮으로 들여다보며 산줄기·강줄기를 따라 작은 도시들을 만나는 게 좋았단다. 충청북도 미술제에 나가 금상을 받았을 만큼 그림을 잘 그렸지만, 그 시절 시골 수재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를 위해선 그림보다 공부가 우선이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해 역사를 공부했다. 그런데 역시나 우연은 필연이 됐다. 그렇게 좋아했던 지리에 역사를 얹으니 땅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과 세상이 더 또렷하게 보이더란다. 신문기자로 밥을 벌면서는 오늘을 사는 이들의 모습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보였다.

중앙일보 ‘Week&’ 섹션 근무를 할 때 고(故) 김영택 화백의 ‘펜화기행’ 연재를 담당하게 됐다. 김 화백의 인사동 화실을 들락날락하며 어깨너머로 펜화의 세계를 구경하다 불쑥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008년 3월 8일 토요일이었어요. 식탁 위에 아이의 스케치북을 펴고 펜촉에 잉크를 찍었죠. 다음 날 아침, 다보탑 그림을 본 아내가 엄지를 치켜세웠고 그 길로 펜화에 빠져들었어요. 홀린 느낌이었죠.”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펜을 쥐었다. 주말에는 내처 그렸고, 어쩌다 휴가를 내면 모든 연락을 끊고 화판 위에 머리를 박았다.

“2015년 4월 유럽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비행기 창문 아래 펼쳐진 산하에 넋을 잃었는데 생각 하나가 벼락처럼 머리를 스쳤어요. 내가 동경해 온 세상을 새는 다른 눈으로 보겠구나.” 안 작가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그리는 ‘비행산수: 하늘에서 본 우리 땅’ 시리즈가 탄생한 계기다. 중앙SUNDAY에 6년 간 ‘비행산수’를 연재하면서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 남쪽 도시 40여 곳을 그렸다. 직접 발품 팔아 전국을 돌며 되새긴 풍경들이다.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과 함께 중앙SUNDAY에 ‘공간탐색’을 연재할 때는 김훈·김덕수·구본창·이호재·안은미·황석영 등 문화계 저명인사들의 작업실을 스케치했다. 중앙일보 온라인에 ‘안충기의 긴가민가’ ‘안충기의 펜톡’ ‘안충기의 펜화서울도감’ 등도 연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4년 6개월을 그린 ‘강북전도’. 가로 251㎝ 네 폭으로 그려 이어 붙인 작품이다.

인왕청풍(仁王淸風) 56x76㎝, 종이에 먹펜(2023)

인왕청풍(仁王淸風) 56x76㎝, 종이에 먹펜(2023)

손에 굳은살이 떨어져 나갔다가 새살이 돋기를 연거푸. 어깨와 등이 굽어도 멈출 수 없는 펜화의 매력을 물었더니 “내 안에서 들끓던 번민·번뇌·갈등이 잦아들고 비로소 삶이 순해지기 시작했다”고 답했다. “정상은 아니죠.(웃음) 그런데 세상에 정상, 비정상이 따로 있나요.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성격이 다르고 관심과 재능이 다르죠. 인생의 행복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느끼는 거죠. 뭐든지 꾸역꾸역 하다보면 쌓이고 그게 역사가 되는 거죠. 술도 자꾸 먹으면 느는 것처럼.(웃음)”

안 작가는 3월 22일부터 4월 3일까지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국미술재단 갤러리 카프에서 ‘안충기 펜화전: 서울 산강(山江)’ 개인전을 갖는다. 북한산·백악산·인왕산 주변 등 서울의 동서남북을 그린 작품 22점이 소개된다. “맨날 하늘에서만 놀면 어지럽고 멀미 나잖아.” 친구의 말에 이번에는 땅으로 내려왔단다. 지난 수년 간 걸어 다니다가, 차 타고 다니다가 마음에 담아둔 서울 풍경들을 선보이는 자리다. 성북동 길상사 관음상과 그 앞을 뛰어가는 소녀의 모습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작품 ‘길상사 : 10월의 크리스마스’에는 흰 눈송이가 가득 찍혀 있다. “흰 붓으로 눈송이를 찍으면서 엄청 살 떨렸죠.(웃음) 점 하나 잘 못 찍어서 수개월을 그린 그림을 망칠까 봐.” 실 뭉치 닮은 고양이·부엉이 등 소품들도 사랑스럽다.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세상에서 안 작가는 흑과 백, 두 가지 색으로만 세상을 담는다. 컬러리스트 자격증이 있을 만큼 컬러 공부를 많이 했지만, 그래도 최고는 ‘흑백’이라는 결론이다. 덕분에 안 작가의 그림들은 묵직하면서도 따스하다. 어쩌다 떨어뜨린 먹물 한 방울을 비행기로, 헬리콥터로 재탄생시키는 안 작가만의 위트는 이번 작품들에서도 숨은그림찾기처럼 미소를 짓게 한다. “0.1㎜ 선으로 차린 소찬, 찬찬히 드셔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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