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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 100만원 줘도 안해!"…운전면허에 자존심 건 어르신들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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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 강서치매안심센터에서 윤모(84)씨가 치매선별검사를 받고 있다. 강서치매안심센터 제공

서울 강서치매안심센터에서 윤모(84)씨가 치매선별검사를 받고 있다. 강서치매안심센터 제공

갑자기 단어 여러 개를 외우고 나열하라고 하니까 순간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아휴,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지난 11일 오후 서울 강서구치매안심센터 검사장에서 치매 선별 검사를 마치고 나온 노모(76)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씨는 이날 75세 이상 고령운전자 운전면허 갱신을 위해 아내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정상 통지에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내의 얼굴도 환해졌다. 노씨는 “젊은 사람들이 음주운전 등으로 사고를 더 많이 치는데 운전하는 노인 전부를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했다.

치매선별검사는 고령운전자 면허 갱신의 첫 관문이다. ‘정상’이란 결과지를 받아야만 이후 온·오프라인 고령운전자 교육 등 다음 절차를 밟을 수 있다. 경도 인지장애나 치매 등 정밀 검사 소견이 나올 경우 면허를 갱신하지 못하는 터라 검사자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돌았다. 센터 안내데스크에서 직원이 주민등록증 생일과 실제 생일 확인, 키·몸무게·먹는 약 등 기본인적사항을 확인한 뒤 10~15분가량의 검사가 이뤄진다.

센터를 찾는 노인 면허갱신 신청자는 하루 10명이 넘는다. 2019년부터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75세 이상 고령운전자의 면허 갱신 주기를 5년→3년으로 단축했기 때문이다. 만료 기한이 많이 닥치는 연말이면 업무가 마비될 정도다.

75세 이상 고령운전자들이 지난 11월 서울 강서구치매안심센터에서 운전면허 갱신을 위한 치매 선별 검사 신청을 하고 있다. 정세희 기자

75세 이상 고령운전자들이 지난 11월 서울 강서구치매안심센터에서 운전면허 갱신을 위한 치매 선별 검사 신청을 하고 있다. 정세희 기자

정상 판정을 받지 못해 정밀검사 진단이 뜨면 현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로 변한다. 갱신을 못하는 이유가 센터 탓이라고 고함을 지르거나, 다시 해달라고 항의하는 노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강선옥 부센터장은 “노인들에게 면허는 ‘자존심’으로 실제 운전을 하지 않더라도 소유하고 싶어한다”며 “누가 봐도 위험한 분들에게는 ‘면허보다 선생님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설득하지만, 사실 응하지 않은 분이 더 많다”고 했다.

최근 고령운전 사고가 급증하면서 운전면허증 자진 반납을 유도하는 지방자치단체와 면허증을 지키려는 고령운전자 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시는 3월 7일부터 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70세 이상 어르신에게 10만원 선불교통카드를 지급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29일 은평구 연서시장 앞에서 79세 운전자가 14명 사상자를 낸 추돌사고를 일으키자 예년엔 4월부터 지급하던 것을 올해 한 달 앞당긴 것이다. 다른 지자체들도 10만~30만원 상당 교통카드나 상품권을 면허 반납 반대급부로 준다.

“10만원 교통카드에 내 이동 자유를 반납하라고?”

면허 갱신을 위해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을 찾은 표병문(79)씨가 면허갱신 접수를 하고 있는 모습. 정세희기자

면허 갱신을 위해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을 찾은 표병문(79)씨가 면허갱신 접수를 하고 있는 모습. 정세희기자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부면허시험장에서 만난 표병문(79)씨는 “이날 아침 아버지의 안전을 위해 면허 자진 반납을 권유하는 아들에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약속하고 면허 갱신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표씨는 “노인네가 집에만 있으면 우울하다. 심심하니까 콧바람 쐬러 차 끌고 근처라도 가고 싶고, 소일거리도 해야 산다”며 “어떻게 10만원에 그 재미를 반납하겠냐, 100만원을 줘도 안 한다”고 말했다.

고령운전자들은 면허증 반납 유도 취지엔 공감하지만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입 모았다. 종로구에서 이날 갱신을 위해 시험장을 찾은 배모(77)씨는 “노인에겐 지하철은 어차피 무료인데다가 버스와 택시만 이용 가능한데, 10만원 교통카드는 몇 번 타고 다니면 끝이니 ’일회용 카드’”라며 “만약 가족이 아프거나 하는 급한 일이 생겨서 운전이 필요할 때가 있을 텐데 면허가 없으면 이동이 막히는데 대책 없이 반납하라고 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강서구에 사는 김영재(79)씨는 “사업상 매일 운전을 해야 하는데 운전을 못 하면 일을 못 한다”며 “개인마다 모두 사정이 다른데 일괄적으로 면허 반납하라는 분위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대중교통이 많지 않은 비수도권 노인들에겐 이동수단이 없어지면 외출조차 힘들어진다는 의견도 나왔다.

고령자 사고 느는데, 반납률 2%…“현실적 지원책 찾아야”

실제 5년째 고령운전자 면허 반납률은 2%대를 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2년 65세 이상 운전면허 소지자 438만 7358명 가운데 자진 반납자는 11만 2942명으로 반납률은 2.6%였다. 그 사이 고령운전자 사고는 급증하고 있다. 같은 해 65세 이상 운전자 사고는 3만4652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최근 5년간(2018년부터 2022년) 전체 교통사고는 9.7% 감소했지만, 고령자 사고는 29.7% 급증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전문가들은 일시적인 보상이 아니라 고령운전자의 생활환경을 고려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도로교통공단 안전교육부 임명철 교수는 “생계형으로 운전하거나 주변에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어려운 경우에는 운전면허를 반납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이런 현실을 고려해 야간운전이 어려운 분은 주간에만 운전한다거나, 고속도로 운전을 제한하는 등 조건부 운전면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육근상 전북도로교통공단 선임연구원은 “노인들이 처한 생활권이나 생활 수준 등을 고려해 체감할 수 있는 유인책을 개발하는 동시에, 사고 예방을 위해 75세 이상 고령운전자 갱신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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