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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신고 하면 바보"…연봉 1.3억 부부, 차라리 미혼모로 산다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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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박수영(36·가명)씨는 지난해 아이를 낳고, 최근 신생아 특례대출을 받았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박씨와 같은 회사인 남편의 소득을 합하면 1억5000만원에 달해 신생아 특례대출 소득요건(연 1억3000만원 이하)을 넘는다. 그러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자녀 출생신고 때도 남편의 이름을 올리지 않으면서 소득 요건을 맞췄다. 대출 이자를 낮추기 위해 미혼모를 자청한 셈이다. 그는 “나중에 남편을 아버지로 올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서도 ‘꿀팁’처럼 공유

올해 6월 출산을 앞둔 김민영(32)씨는 신생아 특례대출의 소득요건을 넘어 좌절했다. 김씨는 “주변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이 먼저 ‘설마 혼인신고를 했느냐’고 얘기하더라. 미혼부‧모로 신생아 특례대출을 받겠다는 지인이 한둘이 아니다”며 “혼인신고를 한 사람만 바보 되는 기분이다. 저출산이 심각하다는데 아직도 소득을 따지고 있을 때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지난달 직장인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에 올라온 게시글. 블라인드 캡처

지난달 직장인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에 올라온 게시글. 블라인드 캡처

지난 1월부터 신생아 특례대출이 시행되면서 최저 1%대 금리로 9억원 이하 주택 매입 시 5억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부부 합산 연 소득 1억3000만원까지만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보니 박씨와 같은 방식은 네이버 부동산 커뮤니티 등에서 활발히 공유된다. 외벌이와 맞벌이는 물론 미혼부·모 구분 없이 소득 요건이 똑같은 탓이다. 직장인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 올라온 관련 게시글엔 “안 하면 바보”, “소득 좀 그만 봤으면” 등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특례대출도 3%대 금리…“육아휴직 억울”

대출 금리를 산정하는 데 있어서도 억울함을 토로하는 부부가 나온다. 신생아 대출은 소득에 따라 연 1.6~3.3% 대출금리를 적용한다. 소득 구간은 6개로 구분된다. 예컨대 연소득 2000만원 이하는 1.6~1.85%, 2000만~4000만원 이하는 1.95~2.15%, 1억~1억3000만원 이하는 3~3.3% 이자를 부담하는 식이다. 부부 합산 연소득이 2000만원만 넘어도 정부가 홍보한 1%대 금리를 넘어선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지난해 첫째를 낳고 최근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이모(34)씨는 지난달 경기 부천의 아파트를 매매하면서 신생아 특례대출로 4억5000만원을 대출받았다. 이씨는 3.3% 이자로 연간 1500만원가량을 내야 한다. 이씨의 연소득은 7000만원, 육아휴직 중인 그의 아내는 1320만원(육아휴직 급여 월110만원)이다. 신생아 대출 기준에 따르면 2.7% 금리를 적용받아 연 이자가 1200만원가량이어야 하지만, 신생아 대출이 육아휴직 전 소득(4500만원)을 기준으로 삼다 보니 가장 높은 구간 금리가 적용됐다.

이씨는 “출산을 했기 때문에 받는 특례대출이 육아휴직을 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꼴”이라며 “첫째에 이어 둘째를 곧장 임신하면서 육아휴직 기간이 길어질 텐데 사실상 외벌이로 이자에 양육비를 감당할 일이 벌써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정부가 1%대 금리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해 믿은 건데 실제론 2%대 금리라도 적용받을 수 있는 부부가 몇이나 될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집을 살 때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혼부나 미혼모로 출생신고를 하는 등 이 같은 사례가 일반적이진 않다. 다만 출산 관련 지원을 받는 데 있어 소득조건을 붙이다 보니 정책 곳곳에 구멍이 생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득요건이 따라붙은 건 한둘이 아니다.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아이돌봄 서비스의 경우 소득에 따라 지원 금액에 차이가 크다. 중위소득 75% 이하 가구는 85%를, 중위소득 75%~120% 이하면 60%를 지원해주는 식이다. 중위소득 150%가 넘으면 정부지원은 한 푼도 없다. 올해 3인가구 기준 중위소득은 471만원이다.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돌봄수당에도 소득기준을 적용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9월부터 만 2세(24~36개월) 아이를 할아버지‧할머니가 돌봐줄 경우 돌봄수당 명목으로 월 30만원을 지원한다. 지원대상은 아이돌봄 서비스와 똑같이 중위소득 150% 이하 가구로 한정했다. “중위소득의 몇 %”라는 식으로 편의에 따라 기준을 정하다 보니 경계선에서 탈락한 이들의 불만은 계속해서 나온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정부, 소득요건 필요성 검토

정부도 이 같은 지적이 잇따르자 개선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관계부처 등에 따르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각종 저출산 대책에 따라붙은 소득요건의 적정성을 들여다보고 있다. 재원 마련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지만, 고소득자라고 해서 저출산 정책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맞는지 따져보겠다는 의미다.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300조원 이상을 투입해도 떨어지는 출산율이 이 같은 고민의 배경이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또다시 역대 최저로 감소했다. 올해는 0.6명대를 기록할 전망이다.

결혼과 출산을 하는 나이가 늦어지고, 맞벌이 비중이 증가하면서 출생 가구의 소득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정해진 방향은 없다”면서도 “여러 아이디어를 검토하는 차원에서 기존의 소득요건을 유지하는 게 맞는지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소득제한 속속 철폐

한국보다 먼저 저출산 대응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일본은 최근 들어 소득요건을 철폐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일본 정부는 3자녀 이상 가구를 대상으로 4년제 대학·전문대 등 고등교육 수업료 전액을 면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고등학생까지 지급하는 아동수당의 소득 요건도 철폐했다. 도쿄도 역시 연소득 910만엔(약 8100만원) 이하 가구로 한정하던 고등학교 수업료 지원 대상 전 가구로 확대했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1억원의 출산지원금을 지급하는 기업도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도 저출산 대책 소득제한 같은 배부른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라며 “저출산 해결은 나라의 미래가 걸린 일인 만큼 보다 과감한 정책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이어 “금전적 지원이 저출산 문제의 근본 해법은 아니지만 1억2000만원 벌면 받고, 1억3000만원이면 못 받는 식은 문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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