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손해용의 시선

헝다 버금가는 빚더미 한전·가스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손해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부장

중국 경기침체의 진앙지 중 하나로 꼽히는 부동산 기업 ‘헝다’. 2021년 디폴트에 빠질 당시 부채 규모는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2%인 1조9500억 위안(약 360조원)에 달했다. 국내에도 이에 버금가는 빚더미 기업이 있다. 국내 전력·가스 공급부터 인프라 구축까지 책임지는 양대 에너지 공기업인 한국전력과 한국가스공사다.

한전의 지난해 부채는 전년보다 9조6000억원 증가한 202조4000억원. 가스공사의 부채(47조4000억원)를 합치면 두 기업의 부채는 250조원에 달한다. 지난해 이자로 지불한 돈만 한전이 4조4000억원, 가스공사가 1조6000억원으로 각각 전년보다 57%·75% 늘었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6조5000억원) 정도의 돈을 이자를 내는 데로만 썼다는 것이다. 두 기업의 실적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두 기업 부채 한국 GDP의 11%
인프라·무역·금융 등에도 악영향
독립된 가격결정 기구 서둘러야

두 기업의 부채는 지난해 한국 GDP의 11%로, 중국 부동산 위기를 불러온 헝다의 비중보다 훨씬 높다. 공기업이라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만일 이들이 파산한다면 헝다의 몇배나 되는 충격을 한국에 가져다줄 것이다.

이들이 만신창이가 된 이유는 알려진 대로다. 원가의 70%에 불과한 기형적인 요금 구조 탓에 적자가 누적된 결과다. 행정안전부 지방물가정보 등에 따르면 지난 40년 동안 전국 평균 짜장면 가격은 185배 올랐다. 하지만 전력판매단가와 도시가스요금은 두배로 오르는 데 그쳤다. 팔면 팔수록 손해인 요금을 정상화해야 하는데, 고물가와 4월 총선 때문에 요금 정상화 논의는 아예 중단된 상황이다.

문제는 각종 부작용이 두 에너지 공기업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송·배전망 등 국가의 에너지 인프라 건설에 차질을 빚는다, 첨단산업·전기차 등에 필수적인 전력망 관리에 구멍이 나고 최악의 경우 블랙아웃이 올 수도 있다. 미국에서 2003년 8개 주에서 이틀 동안 블랙아웃 사태가 발생한 것도 전력 회사가 송전망 관리에 돈을 쓰지 않은 결과였다.

실제 한전의 경우 지난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설비 투자에 15조6000억원을 투입하려다가 92%밖에 집행하지 못했다. 2020년 600여건이었던 정전 건수도 2022년 933건, 지난해 1046건으로 늘었다. 가스공사 역시 화력발전소 폐지에 따른 액화천연가스(LNG) 사용 확대로 생산시설과 전력비축기지 등 인프라를 확충해야 할 처지다.

요금을 억누르면서 소비자의 전기·가스 사용은 늘어나고, 에너지 수입이 다시 증가해 무역적자 규모가 커진다. 무역 마찰도 우려된다. 실제 미국은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수출하는 후판에 한국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했다는 이유로 상계관세를 매기기도 했다. 원가에 못 미치는 값싼 전기요금이 보조금이라는 것이다.

금융시장에선 한전이 적자보전을 위해 발행한 수십조원의 회사채에 투자가 몰리면서 비우량 기업은 자금조달이 어려워진다. 한전·가스공사에 투자한 외국인 주주들이 속속 발을 빼면서 주가가 하락하자 소액주주들은 ‘눈물의 손절’을 해야만 했다. 모두 에너지 요금 동결이 부른 ‘나비효과’다.

우량 공기업의 대명사이던 한전·가스공사가 흔들린 건 문재인 정부 때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에도 요금을 억제한 탓이 크다. 하지만 요즘 업계에선 “지금 정부도 문 정부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송곳 같은 지적이 나온다. 전기요금 동결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던 윤석열 정부마저 원가를 보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소폭 인상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상반기에도 4월 총선을 의식해 요금인상을 피하려는 빛이 역력하다.

근저에는 정치권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요금 결정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현행법상 전기요금은 산업부 산하 전기위원회의 심의·의결 절차를 거칠 뿐, 최종 결정은 산업부에 있고 기재부가 협의 과정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다. 외풍에 휘둘리고,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법적으로도 아무 권한이 없는 여당이 요금 결정에 오지랖을 펼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정치 입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독립된 가격 결정기구가 필요하다. 기준금리를 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처럼 전문성을 가진 인사들이 독립적으로 에너지 요금을 결정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미국(공익사업위원회), 일본(전력가스시장감독위원회), 영국(가스전력시장위원회) 등 선진국들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모델이다. 그래야 전기·가스요금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피하고, 과도한 정책비용을 줄이는 게 가능하다. 나아가 4차산업 혁명에 필수적인 전력의 효율적인 생산과 에너지 다소비 산업구조 개편을 추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