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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율 70%' 빚으로 달리는 오토바이…배달업계 스며든 사채 덫

중앙일보

입력

서울 성동구 배달원 20대 이모씨는 최근까지도 불법 사채를 수시로 썼다. 그런 그가 손을 벌린 곳은 다름 아닌 소속 직장. 배달대행사 관리자는 급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30~40% 이자로 뭉칫돈을 내줬다고 한다. 그렇게 이씨는 2022년 11월부터 지난달까지 800여만원을 빌렸다. 변제 방식은 가게로 출근해 매일 7만원씩 일일 차감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씨 계산으론 원리금을 모두 갚았는데도 관리자는 “빚이 남았다”며 독촉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씨의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나 거주지까지 찾아와 협박과 불법 추심을 일삼기도 했다. 이씨는 “소속된 대행사의 100명 가까운 배달원 중 70%는 관리자에게 이미 빚을 진 상태였다”며 “손쉽게 빌릴 수 있고 금방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채에 손대는 배달원이 많다”고 말했다.

배달업계에 법정 최고이자 20%를 초과한 불법 사채가 만연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은 지난 2월 서울 마포구의 한 식당가에 세워진 배달 오토바이. 연합뉴스

배달업계에 법정 최고이자 20%를 초과한 불법 사채가 만연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은 지난 2월 서울 마포구의 한 식당가에 세워진 배달 오토바이. 연합뉴스

불법 사금융이 배달업계까지 스며들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일부 배달대행사의 지사(支社)에서 소속 배달원을 상대로 법정 최고이자율인 20%를 초과한 불법 사채를 암암리에 운영 중인 것으로 13일 파악됐다. 급전이 필요한 배달원에게 돈을 빌려준 뒤, 업체에 매일 출근해 배달 수익으로 빚을 갚게 하는 방식이다. 한 배달대행사 관계자는 “속칭 ‘마이낑(선불금)’ 대출은 배달업계의 오랜 관행”이라며 “코로나19 시기 형편이 어려운 배달원이 대거 유입되면서 고리대업을 겸하는 악성업자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국토교통부 자료(2022년)에 따르면 배달대행이나 플랫폼 업체 등에서 일하는 전국 배달원 수는 23만 7000여명에 달한다. 배달대행사는 ‘배달의민족’ 등 배달플랫폼의 소비자 주문을 전달받아 대신 배달하는 일종의 중간사업자다. 대표적인 대행사로는 ‘생각대로’, ‘부릉’ 등이 있고 이외에 수십여 개의 중소업체가 난립해있다.

이달 초 배달대행사에서 연 이율 70% 조건으로 1000만원을 빌린 전북 전주의 배달원 A씨는 "빌리고 갚고 무한 반복하는 빚 달고 달리는 오토바이가 수도 없이 많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2월 점심시간 서울 마포구에서 배달함에 음식을 넣는 배달원. 연합뉴스

이달 초 배달대행사에서 연 이율 70% 조건으로 1000만원을 빌린 전북 전주의 배달원 A씨는 "빌리고 갚고 무한 반복하는 빚 달고 달리는 오토바이가 수도 없이 많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2월 점심시간 서울 마포구에서 배달함에 음식을 넣는 배달원. 연합뉴스

업계에선 “지방은 불법 사채 문제가 더 만연하다”고 말한다. 전북 전주시의 배달원 20대 A씨는 이달 초 교통사고 합의금 1000만원을 빌리기 위해 한 배달대행사 문을 두드렸다. 대행사에서 일하면서 하루 11만원씩 100일간 갚는 조건(연이율 70%)이었다. A씨는 “배달원은 애초에 신용이 낮은 이들이 많은 데다, 신용도가 높아도 소득이 일정치 않아 대출 문턱이 높기 때문에 사채에 발을 들인다”고 했다. 그는 “연이율 등 조건 좋은 대행사가 난립해 돈을 빌릴 수 없는 업체를 찾는 게 빠르다”며 “빌리고 갚고를 무한 반복하는, 빚 달고 달리는 오토바이가 수도 없다”고 했다.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배달대행사의 수익은 배달원 수에 비례한다. 건당 수백원의 배달 수수료를 받기 때문이다. 불법 사채는 빚을 진 배달원을 반강제로 일 시켜 수익을 늘릴 수 있는 데다, 이자 이익도 거둘 수 있어 배달대행사 입장에선 일석이조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배달대행사의 자체 프로그램의 가상계좌를 통해 매일 원리금을 상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따로 추심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도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1월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불법사금융 민생현장 간담회'가 열린 가운데 간담회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불법 사금융을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고 인권을 말살하고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는 악랄한 암적 존재"로 규정했다. 변선구 기자

지난해 11월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불법사금융 민생현장 간담회'가 열린 가운데 간담회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불법 사금융을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고 인권을 말살하고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는 악랄한 암적 존재"로 규정했다. 변선구 기자

사채를 운영하지 않는 업체가 경쟁업체에게 배달원을 빼앗기는 상황도 연출되고 있다. 부산에서 10명 규모의 배달대행사를 운영하는 정모(35)씨는 지난해 기존에 소속된 배달원 수십 명이 다른 업체로 옮기는 일을 겪었다. 정씨가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배달원을 지키려 무리하게 대출 자금을 마련하려던 정씨는 대출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정씨는 “정상적으로 영업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상황인데 경찰 등 누구도 단속에 나서지 않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가 앞장서 “불법 사금융 척결”을 외치고 있지만, 배달업계는 관리 사각지대라는 게 업계 주장이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조직국장은 “개인 간 은밀히 대출이 이뤄지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적발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불법 사금융 민생 현장 간담회’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평생 후회하도록 강력하게 처단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이에 정부는 금감원·국세청·대검찰청·경찰청 등이 참여하는 ‘불법 사금융 척결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운영 중이다. 서울지역 경찰서 수사과장은 “배달원 숫자가 많은 만큼 일제 단속에 나서면 피해액도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불법 사채 대신 급전을 빌릴 수 있는 대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 중이다. 박정훈 조직국장은 “지난해 10월부터 노동공제연합 통해 최대 150만원까지 긴급 생활비 대출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달대행 플랫폼 ‘생각대로’ 운영사인 로지올 관계자는 “소속 배달원이 대출이 가능한 1~2금융권 대출 프로그램을 2021년부터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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