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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감 반토막"...쓰러지는 중기, 이젠 팔 수 있는 게 공장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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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지난 1일 별 관리 없이 방치되고 있는 반월시화산업단지 내 폐사업장. 정종훈 기자

지난 1일 별 관리 없이 방치되고 있는 반월시화산업단지 내 폐사업장. 정종훈 기자

지난 1일 오후, 경기 안산의 반월시화산업단지. 산단 초입에 회사 현판이 기울어진 채 녹슨 철문을 잠가놓은 주물 공장이 눈에 띄었다. 인적 없이 방치된 건물 옆으론 접근을 차단하는 빨간 띠가 드리워져 있었다. 공장이 밀집한 골목에 들어가자 '현 위치 매매·임대' 등의 현수막이 붙어있는 빈 사업장이 여럿이었다. 대부분 이전 입주 업체가 내놓은 폐자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근처를 지나던 중소기업 근로자 A씨는 "예전보다 일거리도 줄고, 공단 활력도 떨어졌다"고 말했다. 전력기기 업체 대표 B씨는 "수출하는 기업은 좀 낫지만, 내수만 챙기는 곳은 일감이 이전보다 30~40% 이상 줄었다"면서 "피부로 느껴질 만큼 산단 내에서 문 닫는 업체가 늘고 있다. 밥 먹는 사람이 주니 식당 등 주변 상권도 위축될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진 않다. 경남 창원에서 가공용 툴 등을 생산하는 '성산툴스' 이인수 대표는 "공단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새로 제조업체를 창업하면서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기존 기업들도 신규 투자를 거의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일 반월시화산업단지 내 사업장에 붙은 공장 매매 현수막. 사업장 앞엔 폐자재들이 쌓여있다. 정종훈 기자

지난 1일 반월시화산업단지 내 사업장에 붙은 공장 매매 현수막. 사업장 앞엔 폐자재들이 쌓여있다. 정종훈 기자

내수·수출 부진 속 비용 압박의 '삼중고' 에 제조업의 뿌리인 중소기업이 흔들리고 있다. 이들의 경기 지표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10일 IBK기업은행에 따르면 중소기업 경기동행종합지수는 생산·출하 하락 등으로 올해 1월까지 여섯달 연속 하락세다(전월 대비). 코로나19 유행 초기인 2020년 1~6월 이후 가장 긴 내림세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중소기업 경기 상황을 알 수 있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도 1월 들어 0.25포인트 떨어진 99.44(2015년 100 기준)를 기록했다. 6개월째 내리막이다. 지난해 12월 11개월 만에 100 아래로 떨어졌는데, 올해 들어 경기가 더 나빠진 것이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대기업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진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난달 전체 산업 업황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68포인트로 2020년 9월(64) 이후 가장 낮았다. 기업 규모별(제조업)로는 대기업이 74로 상대적으로 높았고, 중소기업은 65에 그쳤다. 현재 경영 상황에 대한 기업가 판단을 담은 BSI는 기준선 100보다 낮을수록 부정적 응답이 많은 걸 뜻한다.

다 같이 "힘들다"지만 중기의 체감 경기가 훨씬 어두운 셈이다. 금형 업체 사장 C씨는 "대기업서 하청받아서 만드는 물량이 1~2년 전보다 절반은 줄었다"면서 "솔직히 IMF 위기 때만큼 힘들다. 올 하반기 이후에도 경기가 좋아질 거란 기대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엔 고물가·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내수 부진이 크게 작용했다. 내수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국내 소비 추이에 민감한 편이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 들어 3% 넘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이어진 가운데 소비 부진이 뚜렷해졌다. 올해도 먹구름 끼긴 마찬가지다. 한은은 올해 민간 소비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9%에서 1.6%로 하향 조정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지난달 조사에 따르면 경영 애로 사항으로 '내수 부진'(61.6%)을 꼽는 중소기업이 가장 많았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이를 메워줄 중소기업 수출까지 2년째 내리막을 걸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22년 수출액이 전년 대비 0.9% 감소했고, 지난해도 2.3% 줄었다. 2022년까지 늘다가 지난해 역성장한 전체 수출보다 감소세가 길다. 특히 지난해 중소기업들은 '최대 시장' 중국으로의 수출이 10.5% 줄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지난 연말부터 반도체 중심으로 수출 실적이 회복하고 있지만, 대기업 중심의 온기가 아직 중기 업계 전반으로 퍼지긴 역부족이다.

재무 상황이 취약한 중소기업엔 고정비용 확대도 악재다. 고금리 장기화로 대출 이자가 많이 늘어난 데다 전기요금·인건비까지 치솟고 있어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중기 대출 연체율(국내 은행 원화 대출)은 한 달 이상 원리금 연체 기준으로 2021년 12월 말 0.27%에서 지난해 12월 말 0.48%로 뛰었다. 중기 대출 잔액은 지난해 11월 사상 처음 1000조원을 돌파했고, 법인 파산도 늘어나는 추세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이인수 대표는 "금리가 워낙 높아서 대출 이자 부담이 거의 두 배로 늘었고, 전기료도 30~40% 더 내고 있다. 원금 갚아야 할 돈으로 이자를 겨우 갚는 수준"이라면서 "그나마 이자도 못 내는 회사가 많다"고 말했다.

연 1~2% 성장률의 '저성장' 기조가 자리 잡은 만큼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이 쓰러지지 않도록 적극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내수 침체가 길어지면서 중기가 겪는 어려움이 상당 기간 심화할 것"이라면서 "한은이 금리를 바로 내리진 못해도 중기 지원용 정책자금을 푸는 등 유동성이라도 빠르게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장기적으로는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갖도록 환경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추문갑 중기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내수 시장 성장엔 한계가 있으니 중기도 해외에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 정부가 수출 정보 제공과 함께 신시장 개척, 수출선 다변화 등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면서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적용 등 중기 투자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도 풀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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