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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의료 공백 방치하는 의·정 대치…대화 물꼬부터 터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대화 촉구 의사 시국선언…5000여 명 연대 서명

간신히 버틴 현장 붕괴 직전…조건 없는 대화를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침에 맞서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겠다고 밝힌 지 한 달이 다 돼 간다. 정부와 의사들은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일 의대 교수와 전문의 16명이 ‘2024년 의료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모든 이해관계자는 이성을 되찾고, 정부와 의료계 대표는 함께 허심탄회하게 합리적 방안을 논의해 해법을 도출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들은 “국민·의료계·정부의 협력을 통한 진정한 의료개혁의 시작을 간절히 바란다”며 “용기 있는 자기 성찰과 변화를 추구하는 데 적극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에는 필수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할 것과 의대 정원 증원을 포함한 의료 정책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도 열려 있을 것을 요청했다. 전공의에 대한 위압적 발언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 선언에 이틀 동안 교수와 전문의, 병의원 의료진 5236명이 연대 서명했다. 그만큼 의사들도 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의견이 많다는 징후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심각한 의료 공백이 생겼지만 경증 환자들이 스스로 개인병원과 2차 병원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혼자 움직일 수 있는 환자들은 중형 병원 응급실로 분산 수용된 덕에 근근히 버티고 있다.

10일 서울 시내 한 종합병원에서 환자와 의료진들이 이동하고 있다.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인턴·레지던트 등 수련과정을 모두 마친 '전문의' 중심으로 운영되는 중형병원들이 주목받고 있다. 상급종합병원으로 몰리던 중등도 이하 환자들이 중형 병원으로 분산되며 의료공백 사태에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이런 2차병원들마저 점차 한계에 도달하면서, 정부와 의사간 대화를 통한 해법마련 요구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10일 서울 시내 한 종합병원에서 환자와 의료진들이 이동하고 있다.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인턴·레지던트 등 수련과정을 모두 마친 '전문의' 중심으로 운영되는 중형병원들이 주목받고 있다. 상급종합병원으로 몰리던 중등도 이하 환자들이 중형 병원으로 분산되며 의료공백 사태에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이런 2차병원들마저 점차 한계에 도달하면서, 정부와 의사간 대화를 통한 해법마련 요구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이것만으론 현장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 현재 대형 병원들은 각종 수술을 50~60%씩 줄이고 병동까지 통합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아침 외래, 저녁 당직, 다시 외래를 반복하며 전공의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의대 교수들은 번아웃 직전이다. 수술과 외래가 줄면서 부산대병원이 이달에만 100억원대 적자가 예상되는 등 대형 병원들의 적자도 커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아슬아슬하게 지탱돼 온 의료 현장이 실제 붕괴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어떤 명분이든 의사가 환자 곁을 떠나는 것은 비판받을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강경 대응으로 일관할 뿐 대화의 여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단 한 차례 전공의들에게 대화하자며 시간과 장소를 일방적으로 고지한 게 전부다. 그나마 열 명도 안 되는 전공의만 참석해 파행됐다. 그 뒤로는 “의사들이 먼저 의견을 모아 오라”는 식으로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과연 대화로 사안을 풀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

정부는 먼저 대화의 분위기를 만들고 물밑 작업에 나서야 한다. 모든 의제가 열려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대화의 창구를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단추다. 10년 뒤부터 의사 수를 1만 명 늘린다면서 당장 의사 1만 명, 의대생 1만 명이 현장을 떠나고 병원들이 붕괴하는 것을 지켜만 보는 것은 이율배반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