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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석무의 실학산책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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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석무 다산학자, 우석대 석좌교수

박석무 다산학자, 우석대 석좌교수

1797년 음력 윤 6월 2일 다산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谷山) 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생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목민관 생활, 조선이라는 나라로서는 참으로 역사적인 날이자 『목민심서』라는 위대한 고전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1799년 음 4월 24일 부사직을 마치고 내직으로 들어오기까지의 1년 11여개월 간의 목민관 생활은 다산에게 『목민심서』를 저술할 경험과 지혜를 제공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곡산 목민관으로 부임한 다산
맨 먼저 억울한 백성 석방부터
관 횡포 항의 주동자 무죄 판결
“형벌 두려워 않고 백성을 대변”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다산은 본디 왕조 국가에서의 목민관은 작은 나라의 임금에 비길 정도로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목민관들이 제대로 역할을 한다면 세상은 반드시 좋은 정치가 이룩되고 국태민안의 나라가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직접 체험한 곡산의 목민관 생활은 조선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그런 이유에서 다산은 곡산에서 행한 목민관의 업무를 참으로 섬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지도록 정성을 기울였다. 부임해서 퇴임하기까지의 보람 있는 업적들을 모두 기록하고, 목민관이라면 그렇게 행정을 해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줘 목민관의 전범으로 남게 되었다. 『목민심서』에도 대부분 옮겨 기록하여 이론서가 아니라 실제 행정의 지침서임을 알게 해주고 있다.

다산은 자서전 격인 ‘자찬묘지명’(집중본)에 모든 사실을 기록했고 『사암선생연보』라는 책에도 그대로 기록했다. 목민관이라면 이런 정도의 일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모든 일의 전말을 자세하게 적었다. 가장 획기적인 일이고, 선진적이면서,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큰 사건이 부임지인 곡산에 도착하면서 바로 일어났다.

“부임하자마자 이계심(李啓心)의 결박을 풀어주었다(旣赴任解李啓心之縛)”라는 기록이 곡산에서 행한 첫 번째의 일로 나와 있다. 이어서 이계심 사건의 전말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계심이라는 자는 곡산의 백성이다. 앞의 원님이 다스릴 때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포보포(砲保布) 40자의 대금으로 (본래 200냥의 4.5배인) 900냥을 대신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시끄럽게 일어났다. 이때 계심이 우두머리가 되어 농민 1000여 명을 모아 관에 들어와 호소하였는데, 말이 매우 공손하지 못했다. 사또가 계심에게 형벌을 내리고자 했으나 1000여 명이 둘러싸고 대신 고문받기를 원하니 벌을 내릴 수가 없었고, 이계심은 탈출하고 말았다….”

점잖은 표현이지만 사실은 곡산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이다. 주동자 이계심에 농민 1000여 명이 합세하여 관아에 쳐들어가 ‘원님 물러가라’고 천지가 흔들리도록 구호를 외치며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상부로 보고하여 이계심은 5영에 수배가 내렸으나 민간들이 숨겨주어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조정에서는 부사를 파면하고 다산을 후임으로 임명한 것이다. 다산이 부임차 곡산 땅에 도착하자 이계심이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 12조목을 적은 서류를 제출하며 신임 사또 앞에 자수하였다. 군청에 따라온 이계심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린 정약용, 그야말로 200년 전의 일로는 혁명적인 재판을 하기에 이른다. 곡산으로 부임차 조정을 떠날 때 대신들은 모두 “민란의 우두머리 몇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고 당부했건만, 다산의 판결은 분명히 달랐다.

주문: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今日汝白放矣).”

참으로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주문에 이어지는 판결 이유는 더욱 놀랍다. 어찌 200년 전의 재판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목민관이 밝은 정치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자신의 몸보신에만 영리하여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관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謨身 不以瘼犯官也).”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어도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려운 일이다.”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나라의 기강을 세우라던 중앙의 대신들 분부까지 묵살하고, 벌을 주기보다는 천금으로 사야 할 사람이라고 칭찬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잘못하는 관(官)에 강력히 항의할 때에만 관이 밝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국민 저항권. 200년 전 전제군주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니 혁명적인 판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재시대, 관의 잘못에 항의하다가 얼마나 많은 국민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가. 비록 200년 뒤이지만 우리는 이계심의 전통을 이어 촛불로 항의하여 대통령을 파면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4·19, 5·18, 6·10항쟁 모두 국민 저항권의 발동으로 역사를 바꾸었다. 오늘의 현실에서 이계심의 외침이 새롭다.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외침, 시대고 해결의 열쇠는 거기에 있을 뿐이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