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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제 역할 못하는 사외이사 제도 이대로 좋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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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종섭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이종섭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한국경제의 놀라운 성장과 역동성에 국내외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과거의 양적 성장도 놀랍지만 각 분야에서 감지되는 미래의 가능성도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통적인 제조와 서비스의 탄탄한 기반 위에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부문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줬고 지금은 디지털과 바이오, 우주·항공까지 최첨단 산업전선에서 수많은 기업과 기업가들이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우려와 비판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수많은 규제와 반(反)시장적 정서가 결국 성장의 걸림돌이 될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투자의 극단적 쏠림 같은 자본시장의 문제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고급 두뇌 공급의 한계, 산업 인력 부족, 지정학적 리스크와 한계 등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사외이사의 감독 역할 기대 이하
내부자거래 의혹 경영진 추천도
거수기 넘어 실질적 독립성 필요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기업 스스로 발목을 묶고 있는 족쇄도 있다. 지배구조 문제다. 취약한 지배구조가 결국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지적이 줄곧 나오는데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오랫동안 비난과 경계의 대상이던 대주주 경영의 부작용은 다양한 제동 장치를 통해 걸러지고 있지만, 기업 지배구조의 핵심인 이사회의 기능은 제대로 작동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사회는 크게 경영진의 경영 행위에 관한 감독과 조언을 담당한다. 전자는 독립성을 지닌 사외이사의 활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다. 2000년대 초 미국에서는 엔론과 월드컴의 회계 부정 사태로 인해 기업 이사회의 내부 감시 기능 실패가 큰 이슈가 됐다. 그 사건을 계기로 자본시장 선진국인 미국에서 2002년 회계 개혁을 위한 ‘사베인스-옥슬리 법(SOX)’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이사회의 독립성을 기업의 가장 중요한 상장기준으로 지정하는 동기가 됐다.

한국에서는 이사회 기능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을까. 국내에도 1996년 사외이사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이 제도는 지금 제대로 숨을 쉬고 있을까. 사외이사 중심으로 운영하는 이사회를 겪어본 전문가들과 투자자들의 대답은 대체로 싸늘하다. 이사회 구성원의 능력이나 열정도 문제이지만, 독립적 감독자로서 이사들의 역할 인식이 주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뼈아프다.

필자는 십 년 전 재무경제학 최고 권위 학술지에 단순하지만 중요한 이사회의 독립성에 관한 논문을 기고했다. 이사회의 구성과 운영에서 눈에 보이는 사전적 독립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이들의 사후적 독립성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Birds of a Feather’. 즉, 초록은 동색이다. 함께 이해관계를 나누는 사이에 이사회의 독립성은 사후적으로 심각하게 훼손되기 쉽다. 경영진과 잦은 내부 교감을 통해 사외이사의 사후적 독립성이 훼손된다면 이는 주주가치 제고에 직접적 걸림돌이 된다.

최근 사령탑 교체가 진행된 포스코홀딩스를 보면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자사주 매입을 앞두고 내부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가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이사회든, 개인이사든 모를 리 없다. 2022년 12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조차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관련 법 개정으로 자사주 거래에 관한 이사회의 정보 공시 기준을 강화했다.

그런데 내부자거래 의혹으로 신뢰에 금이 간 경영진을 이들이 선택한 사외이사로 구성된 추천위원회가 또다시 사령탑으로 추천했고, 이사회는 순식간에 추천을 받아들였다. 초일류 기업을 지향하는 기업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금융기관과 달리 감독기관조차 없는 포스코에서 무엇보다 주주의 75% 이상이 소액주주인 기업에서 이사회의 임무는 막중하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독립성의 잣대는 다른 기업보다 더 매서워야 한다. 그런데 포스코에서 그 기능은 지금 정지된 듯싶다.

주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할 마지막 보루인 이사회가 그 역할을 포기하면 그 기업에 더 이상 안전장치는 없다. 이사회가 거수기 수준을 넘어 경영진의 보호막이 되는 상황은 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고, 기업 스스로 선택한 운영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 원인이 어느 쪽이든 형식적인 독립성을 넘어 이사회는 실질적 독립성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소액주주뿐 아니라 대주주 모두에게 더 가치 있는 기업 밸류업(Value-up)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종섭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