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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전쟁' 속 대선 치르는 바이든, '중간단계' 연일 강조 의도는…"北 오판 경계" 우려도

중앙일보

입력

정 박 미국 국무부 대북고위관리는 5일(현지시간) "궁극적인 비핵화로 향하는 과정에 '중간 단계 조치'(interim steps)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미국이 중동과 유럽에서 두 개의 전선을 다루는 가운데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대형 도발에 나서지 않도록 북한 관리에 나서는 모양새다. 그러나 이는 자칫 북한에 불법적 무력 증강이 미국을 움직이는 효과가 있다는 식으로 오판할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박 미국 국무부 대북고위관리(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 겸 대북특별부대표)가 5일(현지시간) 워싱턴DC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발언하는 모습.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캡처.

정박 미국 국무부 대북고위관리(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 겸 대북특별부대표)가 5일(현지시간) 워싱턴DC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발언하는 모습.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캡처.

"비핵화, 하룻밤엔 불가능"

박 대북고위관리는 5일(현지시간) 워싱턴DC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비핵화는 하룻밤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현실"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북한의 무기 관련 활동과 (핵) 확산의 범위를 고려할 때 우리가 다뤄야 할 무기가 아주 많다"며 전술핵무기에 들어가는 고체 연료, 초음속 미사일 등을 예로 들었다.

또 중간 단계 조치가 북한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로 이어지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중간 단계 조치가) 최종 단계라고 예단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북한이 핵 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미사일 숫자 제한 등 군축에도 열려 있느냐'는 질문에는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우리의 목표는 분명하다"며 선을 그었다.

앞서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지난 4일 '중앙일보-CSIS 포럼 2024'에서 "미국의 목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며 "그러나 만약 전 세계 지역을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 단계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특히 현재 한반도 상황을 고려할 때 위협 감소(threat reduction)를 위해 북한과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다.

이와 관련, 미 백악관 NSC 대변인은 4일(현지시간)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해 노력하는 동안 북한과 가치 있는 여러 대화를 모색할 것이며, 이는 한반도에서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의 위험을 줄이는 것을 포함한다"고 밝혔다. 한국 외교부도 5일 "윤석열 정부의 비핵화 로드맵인 '담대한 구상'과 동일한 취지"라는 입장을 밝혔다.

4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중앙일보-CSIS 포럼 2024'에서 미라 랩-후퍼 미 백악관 NSC 겸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화상으로 특별담화를 하는 모습. 김종호 기자.

4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중앙일보-CSIS 포럼 2024'에서 미라 랩-후퍼 미 백악관 NSC 겸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화상으로 특별담화를 하는 모습. 김종호 기자.

두 개의 전장에 부담 느낀 美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단계적 인센티브 제공은 새로운 제안은 아니다. 하지만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데다 바이든 행정부가 공개적으로 '중간 단계 조치'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라 관심을 모았다.

이와 관련,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동시에 감당하는 가운데 북한까지 '선 넘은 도발'에 나설 경우 안보 여력 분산은 물론, 대선에도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해 보다 적극적인 관여 메시지를 보냈다는 해석이 나온다. 게다가 바이든 대통령을 각종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중)김정은과 잘 지냈고 미국은 더 안전했다"며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EPA·로이터. 연합뉴스.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EPA·로이터. 연합뉴스.

그러나 대선 국면에서 나온 미국의 '중간 단계 조치' 제안이 자칫 북한의 몸값을 키워주는 결과로 이어질 우려도 제기된다. 김정은으로서는 지난 몇 년간 지속해온 '국방력 올인' 정책과 불법적 군사 협력을 중심에 둔 최근의 대러 밀착 기조가 드디어 효과를 보고 있다고 오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랩-후퍼 선임보좌관과 박 고위관리의 발언에선 공통적으로 한반도에서의 우발적 충돌과 예기치 못한 긴장 고조를 꺼리는 뉘앙스가 감지됐다. 북한이 미 대선을 앞두고 이를 역으로 이용해 물리적 도발을 감행하거나 '판 흔들기'용 메시지를 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중간 단계' 개념 애초에 달라 

전문가들은 미국이 이야기하는 '중간 단계 조치'와 북한이 원하는 단계적 보상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비핵화에 기여하는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취지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6일 중앙일보 통화에서 "제네바 합의와 북핵 6자회담부터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시도하고 실패했던 모든 협상이 '중간 단계 조치'(interim steps)에 관한 것이었다"며 "북한이 원하는 조치를 미국이 받을 리 없고, 미국이 원하는 조치를 북한이 받을 리 없는 가운데 양측이 접점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개념을 또 다시 꺼내들어봤자 자칫 북한과 협상해도 소용이 없다는 '협상 무용론'만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미국이 이야기하는 '중간 단계'는 신뢰를 구축하고 위협을 감소하자는 취지에서 군사적 분야의 대화를 모색한다는 기존 입장의 연장선"이라며 "북한이 원하는 것처럼 북·미가 대등한 위치에서 핵무기를 감축해나가자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북핵을 사실상 용인하고 중간 단계에서 '딜'을 하자는 뜻이 아닌데, 미 대선을 앞두고 불필요한 의구심이나 북한의 오판으로 이어져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정상회담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정상회담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원칙론 지킬 조율된 메시지 필요

다만 임기 내 지켜온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원칙론'이 유연해졌다는 인식이 벌써부터 대북 대화파를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에 이어 미국까지 북한과 대화를 모색하는데 한국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의구심은 새로운 남남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오는 14일까지 매년 북한이 무력 시위의 빌미로 삼았던 한·미 연합훈련이 진행되는 가운데 양국 간 조율된 추가 메시지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 외교부 당국자는 6일 "한·미 양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공통된 목표 달성을 위해 지난달 28일 외교장관회담을 포함해 각급에서 수시로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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