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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 거느린 아이돌도 아닌데…음원차트 휩쓰는 이 노래 정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00년 발매된 가수 최재훈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임재현의 '비의 랩소디'. 사진 새벽테잎

2000년 발매된 가수 최재훈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임재현의 '비의 랩소디'. 사진 새벽테잎

아이돌 신곡들이 포진한 음원차트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발라드 곡이 있다. 24년 전 발매된 노래 ‘비의 랩소디’다.  가수 최재훈의 정규 4집(2000년) 타이틀곡인데, 지난해 12월 가수 임재현이 리메이크해 음원을 냈다.

발매한 지 약 한 달 만에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 멜론 ‘톱 100’에서 정상을 찍었고, 발라드로선 21개월 만에 지니뮤직 1월 월간 차트 1위에 올랐다. 아이유·르세라핌·태연 등 강한 팬덤을 지닌 가수들 사이에서 석 달 가까이 차트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롱런하는 리메이크곡 증가…1227곡→1384곡

아이돌 음악와 리메이크, 요즘 국내 음원 차트는 크게 이 두 가지로 압축된다. 대형 팬덤을 거느린 아이돌 음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그밖에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노래는 1990~2000년대 명곡을 다시 부른 리메이크곡들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리메이크곡의 특징은 롱런(long-run), 즉 오랜 기간 차트에 머무른다는 점이다.

멜론 2월 월간 차트에서 8위를 차지한 너드커넥션의 ‘그대만 있다면’은 1999년 발매된 일기예보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지난해 8월 리메이크된 이후 반년 넘게 차트에서 사랑받고 있다. 같은 차트에서 31위에 오른 임영웅의 ‘사랑은 늘 도망가’는 2010년 이문세의 노래가 원곡인데, 원곡의 힘과 함께 임영웅의 거대 팬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리메이크된 지 2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차트에서 장기집권 중이다. 해당 차트 41위 DK(디셈버)의 ‘심(心)’은 2002년 록가수 얀의 노래를 다시 부른 것이다. 1년째 차트에 머무르고 있다.

1999년 발매된 일기예보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너드커넥션의 '그대만 있다면'. 사진 멜론

1999년 발매된 일기예보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너드커넥션의 '그대만 있다면'. 사진 멜론

이처럼 가시적인 성과가 잇따르자 리메이크곡 발매는 ‘다시 부르기’ 열풍 수준으로 활발하다. 4일 멜론에 따르면, 한 해 동안 발매된 리메이크 음원은 2022년 1227곡에서 지난해 1384곡으로 늘었다. 이중 상당수는 경연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했다.
배우 안세하의 ‘아이 러브 유’(I Love You) 리메이크 음원이 대표적이다. 1983년 일본 가수 오자키 유타카가 발표한 이 노래는 국내에선 2000년 포지션이 리메이크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안세하는 2년 전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KBS)에서 꾸민 무대가 주목을 받자 올초 음원을 발매했고, 발매 직후 음원은 국내 주요 차트 ‘톱100’에 진입했다.

경연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리메이크 제작 증가세는 뚜렷하다. 가수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리메이크곡 역시 2022년 262곡에서 지난해 338곡으로 증가했고, 올해는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52곡이 발매됐다. 가수 이승기는 1997년 발매된 임재범의 ‘비상’을 다시 불렀고, 이수영은 2002년 가요순위 프로그램 첫 1위를 달성한 곡 ‘라라라’를 다시 부를 계획이다. 올해 발매된 리메이크 음원은 지난달 21일 기준 2.5억 회 재생됐고, 전체 멜론 이용자 중 78%가 청취했다.

“신곡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제작 리스크 최소화”

리메이크 열풍에 대해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음악 업계가 불황일 때면 기존 인기곡을 리메이크하며 안정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패턴이 반복됐다”고 짚었다. 김 위원은 “리스너(청취자) 세대가 완전히 교체되면서, 팬덤 위주의 아이돌 음악 사이에서 신곡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라고 현 상황을 진단하며 “이럴 때마다 리메이크나 머니코드(대중에 친숙한 상업적 멜로디 코드), 샘플링(기존 곡의 일부를 발췌해 새 곡에 삽입) 등 과거의 경험을 활용한 노래 제작으로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 업계의 오랜 방식”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1월 5일 발매한 보이그룹 라이즈의 곡 ‘러브 원원나인’(Love 119). 2005년 나온 이지(izi)의 ‘응급실’을 샘플링했다.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지난 1월 5일 발매한 보이그룹 라이즈의 곡 ‘러브 원원나인’(Love 119). 2005년 나온 이지(izi)의 ‘응급실’을 샘플링했다.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실제로 리메이크 뿐 아니라 샘플링 제작도 늘었다. 과거엔 클래식이나 팝 등 다른 장르에서 가져왔다면, 요즘엔 국내 곡들을 샘플링하는 경우가 많다. 보이그룹 라이즈는 2005년 나온 이지(izi)의 ‘응급실’을 샘플링한 곡 ‘러브 원원나인’(Love 119)을 발표했고, 르세라핌 멤버 허윤진과 함께한 그루비룸의 ‘예스 오어 노’(Yes or No)는 2008년 발매된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러브’(Love)를 샘플링했다.

이에 대해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는 “한국 가요계에 작품이 어느 정도 쌓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봤다. “우리 대중음악 역사가 오래됐지만, 60년대 노래를 90년대에 리메이크했을 때는 사실 좋은 반응을 기대하긴 어려웠다”며 “90년대 이후 노래의 감성은 요즘 노래와 비교했을 때 촌스럽다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의 다양성 측면에서 우려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 교수는 “리메이크곡이 많아지는 현상은 한국 음악 산업의 다양성 문제도 수반한다. 음악 산업 내 인력과 자원이 아이돌 음악 등 특정 장르에만 몰리게 되면서 나타난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대화 대중음악평론가는 “가수의 기록을 만들어내는 팬덤은 활발하지만, 그 외 대중은 신곡이나 새로운 가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익숙한 곡들을 새로운 사운드로 듣는 경향이 생겨나지 않았다 싶다”면서 “지금의 음악계를 계속 에너지 있게 몰아붙이는 유일한 요소가 팬덤이라 제작 역시 아이돌 음악 위주로 진행되면서 다양성이 많이 위축되고 있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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