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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의대 증원 ‘2000명의 늪’ 벗어나 대화로 풀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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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순우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장

박순우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장

지금 의료계가 의대 증원 ‘2000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전공의와 의과대학생은 병원과 학교 밖을 떠돌고 있다. 수련의들이 새 연차 근무를, 학생들은 새 학년을 시작해야 하는데도 텅 빈 강의실과 허전한 병원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자책감이 든다.

문제의 근원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별 의대 정원 신청 현황이 발표되면 사태는 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대화와 타협의 자리가 시급하다. 그래야만 전공의와 학생이 병원과 학교로 돌아오도록 설득할 명분이 만들어진다. 환자나 교실을 떠나서 마음이 편할 전공의와 학생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일상 복귀를 누구보다 더 원하고 있다.

새학기인데 병실·강의실 텅 비어
증원 2000명 논리적 근거 불명확
정부의 포용력, 민주적 접근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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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한 타협을 위해 정부는 2000명 증원의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해명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껏 수긍할 정도로 명쾌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세 가지 보고서’에 근거했다고 했으나 해당 연구자들은 매년 1000명을 늘려 10년간 유지하거나, 매년 5~7% 누적 방식으로 늘리자고 제안했다고 공개했다.

그러자 정부는 지난해 대학별로 조사했던 수요 조사(‘증원 희망 인원’)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그 조사 과정에 총장·재단 등 외부 압력이 얼마나 작용했는지, 대학 측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증원 희망 인원’으로 국가 대사인 의사 수 증원의 근거로 삼는 것의 부당함은 보건복지부에서도 잘 알 것이다.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에서 교육 부실 가능성을 제기하니 정부는 1980년대 졸업 정원제 시절의 정원을 거론했다. 당시 의과대학 교육이 얼마나 파행적이었고 ‘흑역사’로 남아있는지 모를 리 없는데 말이다. 논리가 궁색함이 느껴진다.

증원 규모가 결정된 다음에는 구체적인 배분 방안이 있어야 한다. 정부는 배분 원칙에 비수도권, 소규모 의대, 지역 필수의료, 교육 역량 등을 고려한다고 하더니 실제로는 지역, 학교 규모, 국립과 사립 등에 따른 구분 없이 대학 임의로 정원 신청을 하도록 했다.

수요조사를 했으면 이를 바탕으로 특성별·지역별로 안배하고 조정한 다음에 대학별 수용역량을 파악하고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배분 원칙과 관계없이 일단 2000명을 채우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책임을 대학에 미루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의혹이 든다.

앞으로 몇 년 내에 6600병상 이상의 대학병원 분원이 수도권에 신설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의사 증원 계획이 이들 병원에 필요한 인력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다. 이것이 정부의 의도는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국립대 병원 교수를 3년 이내에 1000명 더 늘리겠다고 한다. 기존 기금교수 등을 정교수로 전환하겠다는데 그 빈자리는 어떻게 메우겠다는 것인가. 결국 사립 의대 교수들이 이동하게 될 텐데 이는 지금도 교수 확보가 어려운 지방 사립대 병원의 진료 역량이나 학생 교육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비수도권 의과대학 27개 중 70%에 가까운 18개가 사립대인데 그 비중과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이 지역의료 강화와 어떻게 부합하는지도 의문이다.

한번 늘린 의사 수를 다시 줄이기는 쉽지 않다. 자칫하면 이공계 붕괴 등 국가 위기로 갈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현행 의과대학 정원(3058명)의 65%를 한꺼번에 증원하면 교육 현장에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의예과 2년의 준비 기간이 있다는데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의예과 폐지와 함께 6년제 교육과정을 준비하고 있고, 이미 적잖은 대학에서 의예과에 의학과(본과)의 필수과목을 개설하고 있다.

2000명이라는 숫자가 왜 이렇게 정부의 금과옥조나 불가침의 성역이 됐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대화의 문을 차단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인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일단 2000명의 늪에서 벗어나 정부와 의사 측 모두 열린 마음으로 양보하고 대화와 타협의 길로 나서자. 학생과 전공의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 그들도 대한민국의 자녀이고 국민의 건강을 짊어질 미래다. 압수수색과 구속, 면허정지·면허취소 등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정부의 담대한 리더십과 포용력, 그리고 합리적·민주적 접근을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순우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