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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서열과 배려의 기러기비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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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곽정식 수필가

곽정식 수필가

겨울이 끝나갈 무렵 서해안에 가면 철새들의 군무가 장관이라는 말에 솔깃하여 군산 행 버스 여행에 합류했다.

군산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 후 일행과 산책을 하던 중 북쪽 하늘로 비행하는 기러기 가족을 보았다. 계절로 비추어봐 그들은 군산, 서천에서 강화도와 옹진반도, 중국 동북 3성을 거쳐서 고향 시베리아로 가는 귀향길이리라. 먼 길을 떠나는 기러기들의 고달픈 비행인데도, 탐조객들에게는 석양과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화였다.

기러기가 겨울 하늘을 나는 광경을 보면 색(色)과 공(空)의 조화가 느껴진다. 또 기러기가 떠나간 창공은 마음속의 공허함인 허(虛)를 깊게 남기는 듯하다.

신·예·절·지 갖춘 기러기 비행
배려 배우고 실천하며 날아가
학교·가정·사회 함께 힘써야

삶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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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러기가 남긴 공허함은 이름 모를 그리움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때로는 그 그리움이 사무쳐 시와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기러기가 떠난 창공을 보면서 쓸쓸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시인 박목월은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 리~”로 시작하는 ‘이별의 노래’라는 시를 썼다. 이 시를 읽고 모골이 송연해진 작곡가 김성태는 여기에 곡을 붙였다. 이제 노래가 된 ‘이별의 노래’는 성악가에 따라 슬프고 비장하게, 또 때로는 장엄하게, 심지어 경쾌하게도 들린다. 노래의 주인공이 된 기러기는 이처럼 시가 되고 노래가 돼 눈물이 되었다가 환희로 변하기도 한다.

기러기는 앞에서 발음해도 뒤에서 발음해도 ‘기러기’다. 그래서인지 기러기는 좌우 대칭의 대오를 갖추고 앞에서 나는 기러기와 뒤를 따르는 기러기가 신호와 울음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며 V자 형태의 비행을 한다. 옛사람들은 이런 기러기의 비행을 가리켜서 ‘안행(雁行)’이라 했다.

조선의 생활 백과사전 ‘규합총서’는 안행(雁行)에는 모름지기 신(信), 예(禮), 절(節), 지(智)의 네 가지 덕이 있다고 했다. “때에 맞추어 왔다가 때에 맞추어 돌아가니 신(信)이요, 날아갈 때도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답하니 그것이 예(禮)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節)이라. 밤이 되면 무리를 지어 잠을 자되 하나가 순찰을 서니 지(智)가 있다.” 안행의 네 가지 덕(德) 중 세 번째인 절(節)을 지키는 것을 수절(守節)이라 한다.

안행이란 말은 기러기가 나는 모습을 말하지만 ‘안행피영(雁行避影)’은 기러기가 앞으로 함부로 나서지 않고 옆으로 피하듯이 제자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유래를 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쓴 장자역주(莊子譯註)에서 찾아보았다.

주(周)나라 때 사성기(士成綺)라는 사람이 노자(老子)를 찾아왔다.

“나는 당신이 성인이라는 말에, 뵙고자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당신을 자세히 보니 당신은 성인이 아니군요.” 사성기는 노자가 지식의 양이 엄청난데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온 자신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사성기의 말에 노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사성기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제 당신을 비방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네요.”

노자가 말했다. “어제 그대가 나를 소라고 불렀으면 나는 소일 것이고, 나를 말로 불렀다면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네. 내게 적어도 그런 모습이나 기질이 있으니까 남이 나를 그렇게 불렀을 텐데, 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화(禍)를 두 번 불러일으키는 게 아닐까?”

노자의 이 말을 듣고 무언가를 갑자기 깨우친 사성기가 기러기처럼 옆으로 걸어가서 노자의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몸을 피했다(雁行避影). 그 후 ‘안행피영’은 배우는 사람이 스승에게 갖추어야 할 태도와 도리를 가리키는 말로 인용되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인지 오늘날에는 ‘안행피영’을 해드릴 수 있는 스승조차 찾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말았다. 기품 있는 스승도, 삼가는 제자도 어디론가 다 떠나버려서인가. 대신 인플루언서들이 유튜브에 나와 ‘구독과 좋아요’를 마구 외친다. 심지어 일선 학교에선 교사들에 대한 학부형의 폭언이 도를 넘었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우리가 말하는 ‘학습(學習)’이란 단어에서 학(學)은 배움이고 습(習)은 실천이다. 학교가 다음 세대를 위한 학(學)의 장이라면, 가정과 사회는 그들의 습(習)을 챙겨야 한다.

군산으로 가는 도중 행담도 휴게소에서 같이 식사했던 사회복지사 권승희 박사가 생각난다. 권 박사는 비빔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설거지 봉사를 오래 했는데 숟가락에 눌어붙은 밥풀은 어지간해선 떨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설거지하는 분들을 생각해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지요.”

배려는 언어가 아니고 실천이다. 해가 지는 수평선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들도 순조로운 비행을 위해 배려를 배우고(學) 실천하며(習) ‘구만리’ 먼 길을 안행하지 않는가.

곽정식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