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보편적 책임감에 대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산마루 그늘진 곳에 잔설이 한 무더기씩 남아있다. 지난가을 뒹굴던 낙엽들은 어느새 부토가 되어 양분이 되었고, 나뭇가지마다 새움이 텄다. 이른 봄이지만 남쪽에서는 벌써 청매화 꽃잎을 푸르른 찻잔에 띄우고 향기를 즐긴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남녘에 살 적에는 계절이 바뀌는 이 무렵이면 유난히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이 많아 조심스럽게 봄을 맞이하곤 했다.

지난 석 달, 안성 참선마을에서 첫 동안거를 났다. 상대적으로 고요하고 부드럽고 안정된 내륙의 바람을 느낀다. 모르는 결에 새로운 환경에 깊이 스며들 듯 살았다. 적응 잘하는 성정을, 처한 여건에 잘 따른다고 해서 수연성(隨緣性)이라 한다.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렵다. 내가 만든 ‘나’를 키울수록 더 그렇다. 오직 수행으로 내가 만든 ‘나’를 줄이거나 없애야 인연에 따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입적 세 스님과의 소중한 인연
동안거 기간 중 지낸 사십구재
마음이 평온하면 어디든 정토

삶의 향기

삶의 향기

동안거 기간에 가깝게 지내던 스님이 세 분이나 원적(圓寂)에 들어 참선마을에서 사십구재를 지냈다. 첫 번째로 원적에 든 스님은 해남 미황사에 머물 때 인연이 된 팔십을 넘긴 분이셨다. 말년에는 수행 삼아 나무나 기왓장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며 한가롭게 지냈다. 원적에 들기 전에 당신의 사십구재를 나에게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단다. 기억에조차 가물거리던 스님이었는데, 그분은 나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나 보다. 기억해주는 고마움에 월요일마다 정성스레 나물밥과 차 한 잔을 올리고 축원을 해드렸다.

두 번째는 중앙승가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제자 비구니 스님이다. 졸업을 앞두고 당한 갑작스러운 입적에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이나 가족들이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노을이 바라보이는 등성이 소나무 아래에 산골(散骨)을 하였다. 대웅전에 사십구일 동안 위패를 모셔 요절을 아쉬워하는 지인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했다.

세 번째는 지난 사십여 년 동안 아낌없이 격려해 주던 사숙 스님이다. 역사의식이 깊고, 종교인의 올바른 역할은 물론 사회적 고통에 대해 늘 연민하며 고통 해소를 위해 실천에 앞장섰던 분이다. 제주 법화사에 삼십 년 동안 머물며 아름다운 구품연지를 조성하였고, 법화원과 법화사를 창건한 신라 장보고 대사가 주도한 한중일 교류의 가치를 선양하였다. 병이 깊어서도 팔만대장경을 한글화하고, 많은 사람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불교성전 간행을 위해 고심하였다. 원적에 다다라서는 ‘빈도의 죽음에 대한 변’이라는 글을 남겼다. “출가 본사나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말라. 빈소도 마련하지 말라. 죽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나를 기리기 위해 돌멩이 한 개도 남기지 말라.”

각기 다른 유형의 세 분 수행자들의 원적을 사십구일 동안 온전히 느끼면서 지낸 동안거였다. 유유자적한 도인의 한가함,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 인류에 대한 보편적 책임감을 실천에 옮겼던 삶을 어느 순간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각각의 인연을 존중하는 공부를 한 것이다.

“인간은 더 큰 보편적 책임감을 길러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보편적 책임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진정한 열쇠입니다. 그 책임은 세계평화, 자연자원의 공평한 사용을 위한 토대이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환경의 적절한 보호를 위한 토대이기도 합니다.”

“종교의 목적은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관용, 관대함, 사랑과 같은 긍정적인 인간의 자질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기심을 줄이고 타인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계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

안거 중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허우성 교수가 번역해 출간한 책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을 들고 참선마을로 찾아왔다. 보편적 책임감과 자비와 세계평화 등 수록된 내용이 신기하게도 나의 생각과 맞닿아 있었다. 인류의 현재의 행복과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인간이 보편적 책임감을 더 키워야 하고, 보편적 책임감이 인간생존의 진정한 열쇠라는 데에 공감했다.

동안거를 함께했던 수행자들이 모두 하산을 하였다. 도반들이 채웠던 공간들은 다시 고요와 평온으로 충만하다. 사실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면 산중에 살더라도 평온하지 않다. 해와 달, 구름이나 안개도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어떤 번거로움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분들의 삶은 산속이든 도시든 차별이 없다. 차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본래 성품이 드러난다. 그럴 때 비로소 보편적 책임감이 드러나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문득 한 수행자와 스승이 나눈 문답이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습니까?” “정토 아닌 곳이 있으면 어딘지 말해다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