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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현목의 시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위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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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현목 기자 중앙일보 문화부장
정현목 문화부장

정현목 문화부장

영화 ‘소풍’을 보고 난 뒤 먹먹함과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김영옥·나문희·박근형 배우의 열연 ‘탓’에 극 중 노년의 삶이 불편하리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머지않은 미래를 체험하는 듯했다. 단짝 친구이자 사돈 관계인 은심(나문희)과 금순(김영옥)은 질병만으로도 노년이 버거운데, 자기밖에 모르는 자식들까지 마음을 짓누른다. 쇠락해가는 육체, 현대판 고려장이 돼버린 요양원 등 노년의 쓸쓸한 풍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둘의 마지막 선택은 존엄사란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쓸쓸한 노년 그린 ‘소풍’ ‘플랜 75’
초고령 사회 현실과 고민 담겨
노년의 ‘존엄’ 논의 활발해져야

일본영화 ‘플랜 75’ 속 노년은 더욱 충격적이다. 초고령화로 국가 재정과 청년 부담이 가중되자, 일본 정부는 75세 이상 노인의 안락사를 지원하는 제도를 시행한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78세 미치(바이쇼 치에코)는 생계수단을 잃고, 친구의 고독사를 목격하고는 안락사를 신청한다. 사실상 강제된 죽음의 값은 준비금 명목의 100만원이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지금 일본 사회가 맞닥뜨린 초고령 사회의 현실과 고민이 녹아있어 섬뜩하게 느껴진다. 곧 닥칠 우리 사회의 미래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노인들을 무차별 살상한 청년은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우리 사회에 스멀대는 노인 혐오(또는 폄하) 근거와 다르지 않다. 선거철만 되면 ‘노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 ‘노인네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게 가장 큰 비극이다’ 등의 막말이 터져 나오고, ‘틀딱’ ‘노인충’ ‘연금충’ 같은 노인 비하 표현이 넘쳐나는 현실이다.

두 영화 모두 우울하고 보기 불편하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숙제를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이처럼 현실적인 노년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콘텐트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 단란한 가족드라마 또는 광고 속 안락한 노후는 고되고 쓸쓸한 대부분의 노년과 거리가 멀다.

‘디어 마이 프렌즈’(tvN, 이하 ‘디마프’), ‘눈이 부시게’(JTBC) 등 명작 드라마가 꾸준히 사랑받는 건, 작품성뿐 아니라 노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곱씹게 하기 때문이다. ‘디마프’는 서른일곱살 박완(고현정)의 시선에서 치매를 앓고, 졸혼하고, 암 투병하는 엄마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면서 “그들은 죽음을 향해 내걷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열심히 살아왔던 만큼 처음에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이 초라하지 않게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눈이 부시게’에선 하루아침에 노인이 돼버린 김혜자가 친구들에게 “너희들한텐 당연한 거겠지만 잘 보고 잘 걷고 잘 숨 쉬는 거, 우리한텐 당연한 게 아니야. 되게 감사한 거야”라고 하소연한다. 젊음이 영원할 거라 믿는 청춘들에게 깨달음을 주며,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대사다. 심각해져 가는 세대 갈등 해소에 필요한 건 그런 이해의 시선이다.

존엄사에 대한 논의 못지않게 노년의 ‘존엄’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져야 한다. 일본의 서점엔 노년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담은 책들이 꽤 많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에 실린 짧은 시들엔 일본 노인들의 위트와 해학이 담겼다.

‘연상이 내 취향인데 이젠 없어’, ‘연명치료 필요 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 ‘일어나긴 했는데 잘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 등 읽다 보면 웃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숙연해진다. 자신의 노년을 객관화하면서도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느껴져서다.

반면 우리는 아직도 ‘청춘 예찬’, ‘노인 혐오’의 이분법적 시각에 갇혀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인은 ‘젊어 보았기에’ 힘든 청춘을 버텨내는 청년들을 보듬고, 청년들 또한 ‘늙어갈 수밖에 없기에’ 노인들이 덜 서럽게 나이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온종일 신세 한탄이나 ‘젊은것들’ 욕만 하는 일상이 노년의 삶으로 굳어져선 안 된다. 영화 ‘인턴’에서 30대 여성 CEO의 진정한 멘토가 돼주는 70대 인턴 벤 휘태커(로버트 드 니로)처럼 ‘절대 늙지 않는 경험’을 전수해줘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 의미 있는 노년을 위한 고령화 정책, 공동체적 노력이 꽃을 피울 수 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속절없는 세월 앞에 무릎이 꺾이거나, 교만한 젊음을 볼 때마다 떠올리는 영화 ‘은교’의 대사다. ‘디마프’ 속 대사처럼 “누구에게나 인생은 만만치 않고, 우리는 모두 시한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