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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3등’ 마이크론의 반란…‘이 없이 잇몸으로’ 삼성 제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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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AI 반도체 지각변동

최근 반도체 업계의 최대 화제는 미국 마이크론의 HBM3E 양산 소식이었다. 메모리 반도체 격전지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밀려 점유율 10% 미만인 마이크론이 지난달 26일 5세대 HBM3E를 세계 최초로 양산한다고 전격 발표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특히 올해 엔비디아에 납품하기로 했다는 수주 사실까지 이례적으로 스스로 공개했다. 이로써 마이크론은 메모리 빅3 중 SK하이닉스에 이어 엔비디아의 HBM3E 파트너가 됐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마이크론은 삼성전자는 물론 SK하이닉스와 비교해도 매출·생산능력에서 한참 떨어지는 ‘만년 메모리 3인자’였다. 특히 마이크론은 메모리 빅3 중 유일하게 첨단 D램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동안은 3나노미터(㎚·1㎚=10억 분의 1m) 이하 최선단 공정 경쟁에 접어든 시스템 반도체에서 주로 EUV를 써왔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도 EUV 공정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평택과 이천 공장에서 이미 최신형 D램 생산에 EUV 공정을 쓰고 있다. 마이크론이 EUV 장비 없이 HBM3E를 양산하려면 공정 효율 측면에서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생산비용이 크게 치솟는다는 뜻이다.

이에 마이크론도 EUV 도입에 나섰다. 대만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지난해 말부터 대만 타이중 공장에서 본격적인 EUV 공정 적용에 돌입했다. 산자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는 “내년까지 대만과 일본 히로시마 공장에서 EUV를 도입해 D램을 생산할 것”이라 밝혔다.

글로벌 HBM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SK하이닉스, 트랜드포스, 각 사]

글로벌 HBM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SK하이닉스, 트랜드포스, 각 사]

반도체 산업 전문가들의 정보를 종합하면, 마이크론의 이번 결정이 마냥 근거 없는 도박은 아니었다. 최근 마이크론은 미국 본사에 위치한 연구소와 일본 연구소에 공정을 번갈아 개발시키는 ‘지그재그’ 전략을 구사해왔다. 반도체 전문 조사기관 테크인사이츠의 최정동 수석부사장은 “미국 연구소가 1·3세대 공정을 연구하면 그동안 일본 연구소는 2·4세대 공정을 맡는 식”이라며 “지난 5년 사이 개발 시간을 경쟁사 대비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불붙은 D램 공정 경쟁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테크인사이츠]

불붙은 D램 공정 경쟁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테크인사이츠]

업계에서는 실제 D램 성능을 좌우하는 집적도 측면에서 마이크론이 확실히 삼성전자를 앞섰다고 단언하긴 어렵다면서도, 적어도 메모리 3사의 선단 공정 기술력 격차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본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마이크론이 EUV 없이 여기까지 왔다면 원가와 수율 등 모든 면에서 큰 손해를 감수하고도 고객사인 엔비디아의 요구에 맞춰 공급한 것”이라며 “그야말로 ‘이 없이 잇몸’으로 들이박은 셈”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마이크론은 메모리 빅3 중 유일한 미국 회사라는 점에서 상대적 이점은 향후 더 커질 수 있다. 미 정부가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마이크론의 기습에 허를 찔린 삼성전자의 현주소를 두고 냉정한 평가가 나온다. 기존 D램 제품과 달리 HBM은 고객 맞춤형 제품이다. 칩 성능은 물론 HBM 제조의 핵심인 본딩(접합)과 같은 패키징 기술까지 모두 철저히 고객이 요구하는 바에 맞춰야 수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과거였다면 삼성이 질렀을 법한 과감한 승부수를 오히려 마이크론이 먼저 던진 격”이라며 “30년 간 메모리 1위를 지켰던 삼성이 그동안 놓쳤던 게 무엇인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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