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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벌리포트

'인도의 곡물창고' 그들, 트랙터 타고 뉴델리로 향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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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3년 연속 성장률 7%를 넘는 고속 성장 중인 '인구 대국' 인도가 대규모 농민 시위로 시끄럽다. 수만 명의 농민이 트랙터를 몰고 수도 뉴델리 봉쇄에 나서면서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 농작물 최저가격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가난한 농민들이 오는 5월 총선에서 '3연임'이 유력한 '스트롱맨' 모디의 유일한 반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인도 농민 시위는 지난달 13일부터 본격화됐다. ‘인도의 곡물창고’로 불리는 북부 펀자브·하리아나·우타르프라데시주(州)에서 수만 명이 트랙터·트럭·스쿠터를 타고 뉴델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농민조합 250곳이 참여했고 1만5000대 이상의 트랙터가 동원됐다.

인도 펀자브 주와 하리아나 주 사이의 국경인 샴부 근처에서 농부들이 시위 중 굴착기 위에 올라서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인도 펀자브 주와 하리아나 주 사이의 국경인 샴부 근처에서 농부들이 시위 중 굴착기 위에 올라서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참가 농민들은 정부와의 장기전을 각오하고 각자 차량에 몇달 치 식량을 실었다. 이들은 CNN에 “정부의 약속을 받아내기 전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당국도 행진 저지를 위한 총력전에 나섰다. 고속도로 곳곳에 금속 스파이크를 박았고, 철조망·컨테이너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군경은 드론을 날려 최루탄을 대량 투하한 뒤 물대포와 고무탄으로 쏘는 식으로 농민들을 저지하고 있다.

발포 의혹도 나오고 있다. 지난달 23일 숨진 농부 슈브카란 싱(21)의 머리에선 총상으로 의심되는 상처가 발견됐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병원 관계자를 인용해, 부상자 수백명에게서 펠릿건(Pellet Gunㆍ공기소총의 일종)에 의한 총상 흔적을 보였다고 전했다. 시위진압용 총기로 악명 높은 펠릿건은 한 발을 쏘면 수백개의 작은 탄환이 한꺼번에 나간다. 당국은 펠릿건 사용을 부인하고 있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인도 펀자브 주와 하리아나 주 사이의 샴부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인도 펀자브 주와 하리아나 주 사이의 샴부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공권력을 총동원한 저지 작전에 농민의 행렬은 델리에서 약 200㎞ 떨어진 샴부 등에서 일단 멈춘 상태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방독면을 쓴 채 군경에 격렬하게 맞서며 델리 진입을 시도 중이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사한 최루탄이 터지자 농민들이 엄폐물을 찾아 달려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경찰이 시위대에 발사한 최루탄이 터지자 농민들이 엄폐물을 찾아 달려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경제 호황 속 농가소득은 감소

농민들은 정부가 경제 성장에서 자신들을 배제하고 빈곤 상태로 내몰고 있다고 분노하고 있다. 수년간 인도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인도의 2023회계연도(2023년 4월~2024년 3월) 경제성장률은 7.3%로 전망된다. 유엔(UN)이 예측한 세계 경제성장률(2.4%)의 3배를 웃돈다. 전전년도(8.7%), 전년도(7.2%)에 이어 3년 연속 7%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하게 된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농촌의 살림살이는 반대로 힘들어졌다. 경제 성장에 따라 물가가 올라 농산물 생산비용이 급증했다. 게다가 장마와 가뭄이 반복되는 등 이상 기후 현상으로 수확량은 확 줄었다.

하지만 농산물 가격은 내려갔다. 특히 지난해 7월 당국이 국내 시장 안정을 명목으로 쌀·밀·양파·설탕 등의 수출을 금지하면서 관련 가격이 폭락했다. 식용유 수입 관세를 2021년 30%에서 지난해 5.5%로 낮춘 것도 불만을 사고 있다. 식용유 수입이 늘면서, 대두·유채 등의 현지 가격이 큰 폭으로 내렸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미국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은 “생산비 급등, 수확량 감소에 정부 개입으로 시장 가격마저 급락하자 농가 소득은 형편없이 줄었다”고 전했다. 인도 중앙은행에 따르면 지난 9년간 농민의 대출은 3배 증가했다. 지난해 농민의 대출 규모는 총 20조 루피(약 322조원)에 이르고, 9300만 농가 중 절반 이상이 대출 상환이 불가능한 상태다.

빈곤에 내몰린 농부 중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인도 국가범죄기록국(NCRB)에 따르면 2022년 한해 1만1290명의 농민이 생활고를 이유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인도의 식품·농업 전문가 데빈더 샤르마는 “정부가 의도적으로 농민을 빈곤하게 만든 셈”이라며 “농작물 가격 인하에 따른 모든 이익은 기업과 소비자가 얻고, 농민은 손실을 모조리 떠안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인도 북부 펀자브주 암리차르 외곽의 들판에서 밀 작물을 수확하는 인도 농부. AFP=연합뉴스

인도 북부 펀자브주 암리차르 외곽의 들판에서 밀 작물을 수확하는 인도 농부. AFP=연합뉴스

“모디, 2021년 시위 약속 어겨”

농민들은 모디 총리가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민들은 지난 2020~21년 13개월에 걸친 시위를 통해 정부로부터 ‘농산물 최저 가격 보장제의 확대’를 약속받았다. 최대 23개 작물의 최저 구매 가격을 법으로 보장하는 제도다.

인도 정부는 그러나 쌀과 밀에만 이 제도를 적용했다. 2020~21년 시위 당시 농민들은 팬데믹 와중에 거리 농성을 이어갔고 혹한·혹서·전염병에 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21년 인도 델리에서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수도로 진입한 농민들을 해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21년 인도 델리에서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수도로 진입한 농민들을 해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래서 농민들은 모디의 약속을 동료들의 ‘목숨값’으로 여긴다. 펀자브 출신 보하르 싱(58)은 워싱턴포스트(WP)에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가족에게 남은 건 파산뿐”이라며 “가족과 미래를 위해 끝까지 갈 것”이라고 말했다.

총선을 코앞에 둔 정부와 집권당인 인도국민당(BJP)은 가장 큰 유권자 그룹인 농민과의 갈등을 조기 봉합하는 게 최우선 목표다. 시위가 장기화할 경우 표심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농민 대표단과 총 4차례 협상했으나 모두 결렬됐다. 정부는 콩·목화·옥수수 등 5개 작물에 대해 한시적으로 가격을 보장하고 구매하겠다는 안을 냈으나, 농민 측은 23개 작물 전체에 대한 최저가 법제화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달 14일(현지시간) 샴부 근처에서 경찰이 농민 시위대를 막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하자 방독면을 쓴 농부들이 엄폐물을 찾아 뛰어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달 14일(현지시간) 샴부 근처에서 경찰이 농민 시위대를 막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하자 방독면을 쓴 농부들이 엄폐물을 찾아 뛰어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인도경제, 농업 외 일자리 못 만들어”

이번 사태를 놓고 경제학자들은 “인도 경제가 농업 외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증거”라고 지적했다. 14억 명의 인도 인구 중 약 65%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고, 약 절반(47%)이 농업에 생계를 의존한다.

WP는 2020년 이후 인도의 농업 종사자가 6000만 명 이상 증가했다면서 “인도만의 특이한 추세”라고 전했다. 경제 성장 중인 개발도상국은 대개 도시에 일자리가 급증하고, 농촌에선 주민이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인도는 딴판이란 설명이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센터의 리처드 로소 연구원은 “중국의 경제 개방 초기, 도시에 일자리가 넘쳐났고 농촌은 텅 비었다”며 “반면 인도에선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고 전했다. 제조업 육성과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한 모디의 ‘메이크 인 인디아’ 정책이 자리잡지 못했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인도·중국 GDP대비 제조업 비중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세계은행, 중국 국가통계국]

인도·중국 GDP대비 제조업 비중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세계은행, 중국 국가통계국]

전문가들은 이번 시위가 '모디 3연임'으로 예상되는 총선 결과 자체를 뒤집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 카타르 조지타운대의 우다이 찬드라 교수는 “모디에게 악재이긴 하나, BJP가 압도적 우위를 보이는 선거 판세를 뒤집진 못할 것”이라면서 “다만 농민의 불만과 배신감이 ‘모디 3기’에 심각한 위협 요소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