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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10명 기업대표 "조심하란 말만 해요, 뭘 해야하는 거죠?" [중대재해법 확대 한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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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1월 서울 시내 한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작업자들. 연합뉴스

지난 1월 서울 시내 한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작업자들. 연합뉴스

대구에서 직원 10여명과 함께 합금 주철제품 공장을 운영하는 이모씨는 요즘 생산 설비를 돌릴 때마다 초긴장 상태다. 혹시라도 안전 사고가 나면 크게 처벌 받는다는 언론 보도를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다른 업체 사장들과 얘기해봤지만 솔직히 중대재해처벌법이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며 “조심해서 작업하라고 지시하는 것 말고는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중소건설사에 재직 중인 김모 부사장도 고민이 깊다. 그는 “사고 나길 바라는 회사가 어디 있겠냐”며 “한 명이 여러 역할을 겸하고 있는 작은 기업에서는 대표가 조사를 받으러 불려 다니기 시작하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수 있어, 그게 걱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지난 달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이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됐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산업 현장은 혼란하다. 막연하게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 뚜렷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27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법 적용 확대 이후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중대재해는 총 10건. 모두 사망 사고였다. 10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지만 중대재해법 위반으로 입건된 사례는 아직 없다. 법 적용 확대 나흘 만에 발생한 부산 폐알루미늄 업체(상시근로자 10명) 사망 사고 역시 아직 법 위반 여부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사건 발생 후 입건 등 처벌이 이어지는 경우 최소 한 달 이상, 길게는 몇 달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중기 “중대재해법 재유예 필요”

중대재해법은 일터에서 근로자 사망 등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를 처벌하는 법이다. 2022년 2월부터 50인 이상 사업장(건설업은 공사 금액 50억 원 이상)을 대상으로 시행됐고, 5~49인 사업장(공사 금액 50억 원 미만 건설업)은 2년 유예를 거쳐 지난달부터 적용 중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추가 적용 대상이 된 50인 미만 사업장은 전국 83만 7000곳이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이에 대해 중소기업계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한해 법 적용 유예 기간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지적하는 중대재해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법 조문이 모호하고 구체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 등 안전보건 관리체계의 구축 및 이행 조치’(중대재해법 제 4조 제 1호)를 기업에 요구하지만 이에 대한 내용이나 방법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 또한 제조업, 건설업, 조선업 등 업종별 특성이 다른데도 이를 일률적으로 판단하니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김영현 대한전문건설협회 본부장은 “법 내용의 모호성이 크기 때문에 수사 과정에도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한 타격은 중소업체들엔 치명적”이라며 “정부가 시행규칙 등 하위 법령 제정을 통해 구체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중소기업중앙회 광주전남지역본부가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중소기업대표 1000여명과 '50인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유예촉구 결의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중소기업중앙회 광주전남지역본부가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중소기업대표 1000여명과 '50인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유예촉구 결의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자본과 인력의 여유가 없는 중소기업이 중대재해법에 대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정한 한국여성경제인협회 회장은 “50인 미만 기업은 대부분 영세하다”며 “법 적용을 다시 한번 유예해 소규모 기업도 안전관리자를 양성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고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중대재해법 재유예 주장을 정면 반박하고 있다. 근로자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는 적극적으로 법을 적용해 산업안전체계가 자리잡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동명 한국노총위원장은 “그동안 3년의 유예 기간이 있었음에도 준비가 덜됐다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다”라며 “50인 미만 사업장은 대부분 근로 환경이 열악해 산업재해가 다수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보다 강화된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이 지난달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50인 미만사업장 적용유예 반대 국회 긴급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이 지난달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50인 미만사업장 적용유예 반대 국회 긴급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가 유예안, 국회 처리 될까

정부·여당은 경영계의 입장을 토대로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법 적용을 2년간 미루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야당과 합의하지 못했다. 여당은 21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인 오는 29일 중대재해법 유예를 다시 한번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여야 협상이 결렬된 이상 국회 본회의에 오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중소기업계는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이 미뤄지지 않을 경우 강경 대응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앞서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지난 22일 기자간담회에서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적용 유예안이 29일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을 경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현행 중대재해법에는 일정 수준의 예방조치를 취하면 면책한다는 규정조차 없어, 중소기업은 특히 대응하기 어렵다”며 “추가 유예 기간을 두고 법령상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수정해 실효성 있는 법안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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