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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제원의 시선

대한체육회는 어디로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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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문화스포츠디렉터

대한체육회가 3월 스위스 로잔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 왜 난데없이 로잔 사무소인가. 로잔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국가올림픽위원회(ANOC), 스포츠중재재판소 등 주요 국제 스포츠 기구가 자리 잡은 도시다. 이들과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유럽에 연락사무소를 내겠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스포츠 외교를 명목으로 로잔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한 경우는 없다. 연락을 하려면 전화를 걸면 된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화상회의는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래도 못 미덥다면 현지에 출장을 가서 소통하면 된다. 요즘같이 정보기술(IT)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 적잖은 예산을 들여 해외 연락사무소를 설치한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난데없는 로잔 해외사무소 추진
정부 반대하자 전쟁 선포까지
진정 국민 위한 것인지 살펴야

로잔 연락사무소를 운영하기 위해 드는 예산은 한 해 8억원이다. 둘째 해에는 4억원을 편성했다.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대한체육회의 로잔 연락사무소 개설을 반대했다. IOC위원인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개인의 입지 강화를 위해 로잔에 사무소를 개설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도 나왔다. 그러나 대한체육회가 거세게 반발하자 한시적으로 2년 동안 운영해본 뒤 연장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조건을 달아 지난해 12월 예산 집행을 승인했다.

대한체육회가 왜 이러나. 요즘 뜻있는 체육계 인사들은 가는 곳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의 광폭 질주를 우려하는 이가 적잖다. 이기흥 회장은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정부를 상대로 날선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가 로잔 연락사무소 설치를 반대하자 문체부 공무원을 ‘관료 패거리 카르텔’ 이라고 부르며 전쟁을 선포했다.

급기야 지난 1월엔 서울올림픽공원에서 1만5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체육인대회를 개최했다. 10억원이 넘는 예산을 들인 이 행사는 정부 정책을 성토하는 자리가 됐다. 이날 대한체육회가 배포한 자료는 충격적이다. 국내 상장기업은 의무적으로 학교 운동부를 지원하도록 만드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아무리 체육이 중요하다고 해도 상장 기업이 학교 운동부를 지원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만들자니 대한민국이 무슨 소비에트 공화국인가.

대한체육회의 돌출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가 출범하자 당장 보이콧을 선언했다. 대한체육회가 추천한 인사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며 정부가 주도하는 위원회 참석을 거부하고 별도의 국가스포츠위원회를 설립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3월 국회 앞에서 체육인 5만명이 모이는 결의대회를 열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대한체육회가 ‘정부와의 전쟁’ 운운하면서 이렇게까지 돌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뭔가. 내년 1월로 예정된 대한체육회장 선거와 무관치 않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체육회장 선거는 경기단체 임원과 선수·지도자·동호인·시도 체육회 대표 등으로 구성된 선거인단 투표를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체육회장 선거를 앞두고 단체행동을 통해 세(勢) 과시와 함께 체육인들의 결집 효과까지 노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대한체육회 산하엔 82개 종목에 걸쳐 100만명이 넘는 선수·지도자가 활동 중이다. 2020년 국민체육진흥법이 개정되면서 대한체육회는 전국 17개 시도 체육회까지 아우르는 매머드 조직으로 변모했다.

1980~90년대엔 정주영·노태우·김운용 등 정재계를 대표하는 거물이 체육회장을 맡았다. 그런데 2016년과 21년 선거를 통해 당선돼 8년째 수장을 맡고 있는 이기흥 회장은 유례가 없는 3선 회장에 도전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대한체육회가 정치·경제·언론 등 사회 각계각층의 유력 인사를 특별보좌역 또는 자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모신 것도 이례적이다. 역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 장미란 차관에게 대한체육회의 최근 행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장 차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정으로 (운동)선수를 위하는 건지, 아니면 선수가 아닌 사람을 위하는 건지 살펴보면 답은 명확하게 나옵니다.”

장미란 차관이 말한 ‘선수’를 ‘국민’으로 대체해도 무방할 듯싶다. 대한체육회의 최근 행보가 진정 국민을 위하는 건지 살피면 대답은 나온다. 로잔 연락사무소를 운영하려면 해마다 수 억원의 정부 예산이 든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체육인대회를 개최하려면 10억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야 한다. 7~8명의 특보와 자문관에게 매달 지급하는 급여도 적잖다. 이 돈은 다 어디서 나오나. 혈세가 줄줄 새는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