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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분뇨 푸는 청춘들의 성장기…현대 일본에 던지는 풍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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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영화는 에도 시대 인분을 사다 거름으로 파는 분뇨업자 청년 두 명이 주인공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영화는 에도 시대 인분을 사다 거름으로 파는 분뇨업자 청년 두 명이 주인공이다. [사진 엣나인필름]

일본 사회파 거장으로 꼽히는 사카모토 준지(65·사진) 감독이 19세기 에도 시대 똥밭에서 피어난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을 영화에 담았다.

지난 21일 개봉한 일본 영화 ‘오키쿠와 세계’는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쿠로키 하루)와 인분(人糞)을 사고파는 분뇨업자 야스케(이케마츠 소스케), 츄지(칸 이치로)의 성장영화다. 쇄국을 고수했던 일본이 서구 열강의 압박으로 문호를 열면서 ‘세계(世界)’란 개념이 처음 생겨난 에도 말기가 배경이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어 공포감마저 싹튼 혼란의 시대를, 요즘 N포 세대를 빼닮은 세 청년의 신분을 초월한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에 담아냈다.

사카모토 준지

사카모토 준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을 다뤄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KT’(2002), 태국의 아동 장기·성매매 현실을 고발한 ‘어둠의 아이들’(2008) 등 묵직한 사회파 영화를 해온 사카모토 감독이 초저예산 독립 제작 방식으로 만든 30번째 장편이다.

하필 ‘똥’에 꽂힌 이유는 뭘까. 26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 영화관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사카모토 감독은 “매너리즘에 빠진 일본 영화계에 분뇨 폭탄을 던지고 싶었다”고 답했다.

왜 에도 시대를 택했나.
“귀족·무사들은 집에 지구본이 있을 만큼 ‘세계’란 의식이 있었지만, 서민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가난하게 지냈다. 영화처럼 대문도 안 잠그고 살며 자연 재해에 상부 상조하는 공동체적 삶이었다. 분뇨도 재활용할 만큼 물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썼다. 낭비가 많은 요즘 느낄 점이 많았다.”
똥에 대한 시각적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흑백 영화를 택했나.
“아니다. 예전부터 흑백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저예산 느낌이 난다는 이유로 투자가 안 됐다. 아예 독립영화 형태로 간섭 없이 만들며 도전하고 싶었다. 총 12회차 촬영으로 장편을 완성했다.”
군데군데 컬러 장면도 나온다.
“영화를 한 챕터씩 단편처럼 만들었고 각각의 결말부를 두드러지게 하려고 컬러를 넣었다. 또 이런 순환형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와도 연결되는 이야기란 걸 관객이 알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영화는 일본의 30년 차 미술감독 겸 프로듀서 하라다 미츠오가 기획한  ‘좋은 날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다. 100년 후 지구에 남기고 싶은 ‘좋은 날’을 영화로 전하는 프로젝트다.

흑백 영상의 시대극이지만, 현대적 감각이 담겼다. 종이부터 똥까지 모든 자원을 재활용한 에도 시대 ‘순환 경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식 문화가 융성했던 시대상을 귀족이나 가난뱅이나 똑같이 누는 똥으로 풍자한 시선도 유쾌하다.

영화 제작에도 ‘친환경·순환경제’를 적용했다. 하라다 프로듀서가 의상·미술감독까지 맡아 오래된 것을 재활용했다. 극 중 기모노는 100년 전 다이쇼 시대 입었던 기모노 옷감을 풀어 업사이클 방식으로 제작했다. 염색 원료도 친환경 식물성 재료를 썼다.

일본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치고 지난해 키네마준보 ‘일본 영화 베스트 10’ 1위, 제78회 마이니치영화 콩쿠르 대상 등을 수상했다.

1990년대부터 서울독립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 등 한국을 찾았던 사카모토 감독은 “‘오키쿠와 세계’는 워낙 작은 영화라 일본 개봉도 어려웠는데 한국에서 개봉하는 게 인연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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