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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신’ 신진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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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호 01면

6연승 기적 ‘바둑의 신’ 신진서

신진서 9단이 23일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신진서 9단이 23일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또 하나의 신화가 빚어졌다. 신진서가 끝내기 6연승으로 세계 바둑의 새 역사를 썼다.

한국 최강자 신진서(24) 9단이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최종국에서 중국 1위인 구쯔하오 9단을 맞아 흑 249수 만에 불계승했다. 신진서가 중국의 최종 주자마저 꺾으면서 제25회 농심배는 한국이 품게 됐다. 한국의 16번째 농심배 우승으로 대회는 마무리됐지만, 25회 농심배는 한국 바둑을 넘어 세계 바둑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 신진서 혼자 이뤄낸 단체전 우승이어서다. 한국 선수 4명이 모두 초반 탈락해 신진서만 남았던 절체절명의 상황, 한국 바둑 최후의 보루는 중국과 일본의 최강자 6명을 차례로 다 쓰러뜨렸다. 이창호의 상하이 대첩(5연승)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했다.

혼자서 ‘중국 5대 천왕’ 전원 올킬…신공지능, 역사를 쓰다

신진서 9단(오른쪽)이 23일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중국 구쯔하오 9단과 대국을 펼치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신진서 9단(오른쪽)이 23일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중국 구쯔하오 9단과 대국을 펼치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농심배는 흔히 ‘바둑 삼국지’라 불린다. 한·중·일 3개국에서 5명씩 출전해 최종 승자가 남을 때까지 연승 방식으로 승부를 내는 국가 대항전이어서다. 이번 대회 초반 중국 셰얼하오 9단의 질주가 돋보였다. 7연승을 하는 사이 한국 선수 4명이 1승도 못하고 탈락했다.

2라운드 최종국이 열린 지난해 12월 4일 부산에서 8연승을 노리는 셰얼하오 앞에 한국팀 최종 주자 신진서가 앉았다. 신진서마저 무너지면, 한국은 최종 라운드가 열리기도 전에 전원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신진서는 달랐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지난 19일부터 상하이에서 최종라운드가 시작됐다. 한국은 신진서 1명, 일본도 이야마 유타 1명, 중국은 셰얼하오를 뺀 4명이었다. 신진서는 19일엔 이야마 유타를, 20일부터는 중국 선수들을 물리쳤다. 20일은 중국 7위 자오천위, 21일은 중국 2위 커제, 22일은 중국 3위 딩하오를 꺾었다. 모두 완승이었다. 무려 103개월이나 중국 1위를 차지했던 커제는 힘 한 번 못 쓰고 물러났다. 신진서는 이날 승리로 커제와의 상대전적도 12승 11패로 앞서게 됐다.

23일 최종국이 열렸다. 신진서의 마지막 상대는 중국 1위 구쯔하오 9단이었다. 지난해 란커배 결승전에서 신진서를 상대로 역전 우승을 거뒀던 강자다. 신진서가 세계대회 결승에서 외국 선수에게 역전패한 건 구쯔하오가 유일하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역시 역사는 쉽게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내내 우세했던 신진서가 끝내기를 앞두고 크게 흔들렸다. 우변 전투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형세가 확 넘어갔다. 70% 신진서의 흑 우세였던 바둑이 98.5% 구쯔하오의 백 우세로 뒤집혔다. 신진서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닷새째 이어지는 승부가 끝내 집중력 저하로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 아쉬운 패배를 예감하는 순간, 일찍이 초읽기에 몰린 구쯔하오도 실수를 저질렀다. 예의 그 날카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신진서가 우상귀에서 패를 걸었고 바꿔치기 끝에 형세가 다시 역전됐다. 흑 99.7% 우세. 우세는 마침내 승세로 바뀌었다. 중국의 마지막 자존심 구쯔하오는 1분 초읽기에 몰리고서도 1시간 넘게 버텼지만, 농심배의 새 종결자에 고개를 숙였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뒤 신진서는 “큰 판을 이겨서 뿌듯하다”며 “첫 판을 둘 때만 해도 먼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6연승까지 하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어 신진서는 “대국할 때 우승을 생각하면 안 되는데 생각이 나다 보니 나중에 좋지 못한 바둑을 둔 것 같다”며 “마지막까지 정신을 바싹 차리고 둬서 이길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신진서의 끝내기 6연승은 농심배 25년 역사에서 처음 나온 기록이다. 농심배에서 7연승 기록은 이번 대회 셰얼하오를 비롯해 모두 4번 있었으나 모두 대회 초중반 이뤄졌다. 우승을 다투는 마지막 승부에서 끝내기 연승 기록은 5연승이 최다였다. 그 기록을 이창호가 처음 세웠다. 그 유명한 2005년 제6회 농심배에서의 상하이 대첩이다. 그때도 홀로 남은 이창호가 부산에서 열린 2라운드 최종국에서 승리한 뒤 상하이로 넘어가 파죽의 4연승으로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신진서도 2021년 22회 대회 때 끝내기 5연승을 했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온라인 대국으로 대회를 치렀다. ‘신진서의 온라인 대첩’으로 불리는 승리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신진서는 이번에 농심배 통산 16연승의 대기록도 경신했다. 이전 기록은 이창호의 14연승이었다. 이창호는 1회 대회부터 6회 대회까지 6년간 14연승을 이뤘는데, 신진서는 22회 대회부터 25회 대회까지 4년 만에 달성했다. 그만큼 더 신진서 홀로 분전했다는 의미다. 신진서는 파죽의 6연승으로 이창호가 갖고 있던 대회 최고 승률 기록 86.36%(19승 3패)도 넘어섰다. 현재 신진서의 농심배 통산 승률은 88.88%(16승 2패)다. 2월 23일 현재 신진서의 통산 승률 79%(784승 208패)를 고려하면, 신진서의 농심배 전적은 차라리 경이롭다.

신진서가 이번 농심배에서 거둔 기록 중에 가장 통쾌한 기록은 따로 있다. 신진서 혼자 중국 선수 전원을 다 쓰러뜨렸다. 이 기록도 이번에 새로 쓰였다. 한 선수가 한 나라의 선수 전원을 소위 ‘올킬’ 시킨 것. 한·중·일 3국 중에서 전력이 가장 약하다는 일본도 이런 치욕은 겪지 않았다. 중국은 이번 대회에 랭킹 1위부터 3위까지 최정예 선수가 출전했다.

한국 팬은 통렬한 승리에 열광한다. 젊은 바둑 팬은 지난해 ‘2023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에서의 쾌거에 비유한다. 지난해 롤드컵에서 한국팀 T1이 중국의 최강 4개 팀을 예선부터 8강, 4강 그리고 결승에서 차례로 꺾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 바 있다. 중년 팬은 『삼국지』에서 관우의 ‘오관 돌파’가 연상된다고 한다. 관우가 혈혈단신으로 조조 진영의 5개 관문을 통과하며 6명의 장수를 벤 일화가 신진서의 나 홀로 싸움과 닮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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