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애들에게 "싫어요" 가르친다…성폭력 막는 인형극 24년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21일 김성수 인형 극단 '친구들' 대표가 공연 시작 전 바람잡이 인형인 '용용이'를 한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이들이 달려나와 잡아당겨 인형 소재가 늘어났다고 한다. 장진영 기자

21일 김성수 인형 극단 '친구들' 대표가 공연 시작 전 바람잡이 인형인 '용용이'를 한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이들이 달려나와 잡아당겨 인형 소재가 늘어났다고 한다. 장진영 기자

노란 상의에 청색 멜빵바지, 갈색 베레모까지. 김성수(53) 인형극단 ‘친구들’ 대표는 동화 피노키오 속 제페토 할아버지를 연상시켰다. 사무실 곳곳엔 김 대표가 직접 만든 목각 인형과 탈 등이 걸려있었다. 여섯 명으로 꾸려진 극단은 24년째 아동 성폭력 예방 인형극을 진행하고 있다.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을 하루 앞둔 21일, 경기도 군포의 극단 사무실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국내 아동 성폭력 예방 인형극의 역사를 함께 한 인물이다. 2000년 극단을 세운 뒤 전국의 아동보호 전문기관 등에게 위탁을 받아 직접 제작한 무대 세트와 인형 등을 지원하고, 자원봉사단 등과 역할을 나눠 연극을 진행한다. 극단이 자체 공연하는 무대도 연 150건 이상에 달한다.

김성수 대표(맨 윗줄 가운데)가 아동 성폭력 예방 연극을 마치고 아이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김 대표는 ″의협심이 강한 아이들은 나쁜 역할을 맡은 인형을 잡아당기거나 지우개를 던지는 경우도 있다″며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연극에 대한 몰입도가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사진 독자 제공

김성수 대표(맨 윗줄 가운데)가 아동 성폭력 예방 연극을 마치고 아이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김 대표는 ″의협심이 강한 아이들은 나쁜 역할을 맡은 인형을 잡아당기거나 지우개를 던지는 경우도 있다″며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연극에 대한 몰입도가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사진 독자 제공

김 대표는 인형극이 아동 성폭력 예방 교육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을 이용하면 짧은 시간에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연극 내내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을 묻자 그는 20여 년 전 기억을 꺼냈다.

“혼자 전국을 떠돌며 인형극을 하던 시절이었어요.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 아이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내용의 공연을 했는데, 한 아이가 무대로 난입하고 유독 방해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무대를 정리하는데, 어디서 꺽꺽 소리가 나는 거예요. 돌아보니 그 아이가 웅크려서 엉엉 울고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 아버지한테 학대를 당하고 분리됐던 아이였어요.”

극이 진행될수록 조용해진 아이는 결말쯤 부자가 화해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는 “아마 인형극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며 “그 이후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연극’이라는 사명감이 더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어린시절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복화술의 달인'으로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장진영 기자

김 대표는 어린시절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복화술의 달인'으로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장진영 기자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를 꿈꾸던 김 대표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인형극단을 운영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 ‘진짜 좋아하는 걸 해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극단을 꾸렸다. 수원여대와 경기과기대에서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로 총 15년간 출강하면서도 인형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연극을 위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성폭력 예방에 대한 개념이 시대마다 바뀌기 때문이다. 기사와 논문을 찾아 읽고, 성폭력 사례나 수법을 연구해 전달할 메시지를 고민한다. 또 매주 2회씩 예비 교사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 인형극도 가르쳤다. 그는 “선생이 된 제자들로부터 인형극 조언을 구하는 연락이 오면 현장에서 노하우가 활용된다는 생각에 뿌듯하다”고 말했다.

인형극 '우리 몸의 비눗방울을 지켜주세요' 中

-방울이2: 하하 난 우리 몸을 보호하는 비눗방울이야.
-콩콩이: 와! 비눗방울이 정말 있었어.
-방울이2: 그래. 모든 사람의 몸엔 비눗방울이 있어. 이 비눗방울은 쉽게 터지고 다시 생긴단다. 내가 원치 않는데, 내 몸에 손을 대거나, 부딪히거나, 잡아당길 때, 또 뽀뽀할 때, 손을 잡을 때도 터진단다.
-콩콩이: 하지만, 내가 딸콩이에게 부딪친 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래도 터지는 거야?
-방울이2: 그래. 실수로, 모르고, 어쩔 수 없이 손을 대도 비눗방울은 터진단다. 하지만, 그럴 땐 왜 그랬는지 이야기해 이해되도록 하고, 실수로 그랬으면 사과해야 해. 그리고, 비눗방울이 터졌던 일은 언제든 누구한테든 이야기해야 해. 자 그럼 난 이만~ 방울방울~ (밑으로 사라진다)

김 대표는 극단 초창기 시절, 아이들이 인형극을 보며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라고 외치던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성폭력이 예상되는 순간에 어떻게 대응할지 배운 아이들이 실제로 말하는 연습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범죄자가 ‘너는 착한 아이니까 길을 알려줘야 해’라고 접근할 경우에 대비해 ‘어린이는 어른에게 길을 알려줄 필요가 없으니 어른들에게 물으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인형극을 마칠 때마다 아이들에게 ‘이런 흉흉한 세상이 돼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며 “여전히 20년 전과 같은 수법으로도 아동 성폭력 사건이 되풀이되는 걸 보면 안타깝다. 앞으로도 사명감을 가지고 연극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