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 서일 대종교 종사 손자 서경섭씨/광복후 고국땅에 첫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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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독립유공자 유족대우 기쁘다”
1920년대 만주에서 무장 항일투쟁의 구심체였던 북로군정서 총재로 청산리전투 승리를 뒷받침했고 민족종교 대종교 종사였던 백보 서일선생의 후손이 광복후 처음 고국땅을 찾았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큰 별이었으면서도 그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던 서일선생의 손자 서경섭씨(66).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에 살고 있는 서씨는 부인 문미야씨(57),2남4녀중 1남2녀와 큰사위를 데리고 지난 9월말 입국해 10월14일 독립기념관에서 거행된 「백보 서일선생 어록비」 제막식에 참석하고 발전된 고국을 두루 둘러보며 감회에 젖어있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국이었지만 귀국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발전된 고국을 보니 너무 반갑고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알아주니 흐뭇합니다.』
함북 경원 출신으로 32세때인 1912년 만주로 망명한 서일선생은 홍암대종사 나철선생이 중흥한 대종교에 입교,「회삼경」 「삼일신고강의」 「진리도설」 등을 저술하며 교리를 다듬는 한편 대종교 교인들을 중심으로 중광단를 조직,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중광단은 정의단·군정부로 개편되면서 김좌진장군과 조성환·나중소·이범석·현천묵·이장녕 등 구 대한제국 군대와 의병·만주지역 군관학교 출신들을 규합하고 무장을 강화해 3·1운동 후 북로군정서로 발전됐고 서일선생은 총재로 활동했다.
서일선생의 혈육 1남1녀중 외아들 서윤석씨와 사위 최관씨도 일제의 박해로 25명의 교인이 구속된 대종교의 임오교섭(1942년)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끝에 동경성에서 해방을 맞았다.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서윤석씨는 두 아들(경섭·만섭)을 이끌고 목단강시를 거쳐 56년 하얼빈시에 정착했으나 69년 중국 문화혁명 당시 61세로 작고했다.
서일선생의 후손이 생존해있다는 사실은 중국 연변 역사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이 3년여의 추적끝에 화룡현에서 선생의 묘소를 찾고 경섭씨 가족을 수소문해 지난봄 국내 대종교 총본사에 연락해옴으로써 알려졌다.
전기 기술자로 일하다 정년퇴직해 연금으로 살아가고 있는 경섭씨는 『자식들 중에서도 아래로 내려갈수록 우리말을 잊고 중국사람이 돼가는게 안타깝다』며 26일 중국으로 돌아가면 내년봄쯤 영주귀국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한천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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