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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도륭의 다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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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추억이라면 여행이 으뜸이다. 집 밖을 두려워하는 나에게도 여행의 추억은 있다. 여행이라면 고색창연한 유적지나 명승지를 손꼽지만, 나의 추억은 다르다. 정년퇴직을 하자 40년 동안 고생했다고 아내가 미국 남북 종단 여행을 시켜줬다. 북쪽 미네소타에서 출발했다.

미네소타 주도인 세인트 폴에서 남쪽으로 35㎞를 내려가면 스틸워터라는 한적한 강변 마을이 나온다. 미국에서 쳐주는 골동품 전문 도시다. 내가 그곳을 찾은 것은 고서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는 고서 몇 권을 사 들고 강변 카페에서 마시던 차 맛은 내 일생에 10대 여행 명소 가운데 하나로 기억된다.

신영웅전

신영웅전

차는 중국이 가장 유서 깊을 것이다. 실크로드는 ‘티 로드(Tea-road)’였다. 중국 역사에서 다도(茶道)를 하나의 예술로 완성한 사람은 명나라 도륭(屠隆·1542~1605)이었다. 그는 『고반여사(考槃餘事)』라는 명저를 남겼다. ‘찻상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나눈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다도는 상대와 정을 나누고(和), 공경을 표시하고(敬), 다구(茶具)의 청정을 느끼며(淸), 분위기(寂)를 즐기고자 함이다. 그는 차 따고 덖는 법, 물의 선택, 온도 맞추고 따르는 법, 다기와 효과 등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 가운데서 함께 마시는 벗의 숫자를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에 따르면 차는 마시는 사람의 숫자에 따라 맛이 다르다. 혼자 마시는 것은 그윽하며(幽), 둘이 마실 때는 맛이 빼어나며(勝), 서넛이 마실 때는 즐거우며(趣), 대여섯이 마시는 것은 맛을 모르고 벌로 마시는 것이며(汎), 예닐곱이 마시면 퍼먹이는 것(施)이다.

좋은 친구와 마셔야지 우르르 몰려가 왁자지껄한 것은 차담이 아니다. 늦은 나이의 유학 시절에 너무 외로워 유학생 상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니 혼자 차를 마셔보라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