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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잡아두려는 시진핑과 달아나려는 김정은

중앙일보

입력

“인간은 항상 높은 곳을 향해 가고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人往高處走 水往低處流)”라는 말이 있다. 이를 국가에 비유하면 약소국은 국익의 관점에서 더욱 유리한 후견자가 발견되면 당연히 그곳을 향한다는 뜻이다. 북한이 여차하면 중국과 거리를 두고 미국이나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고 한다는 얘기가 나돌 때면 종종 등장하는 문장이다.

북한이 중국과 혈맹 관계를 유지하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국의 경제원조다.

중국이 1948년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북한에 제공한 경제원조는 약 9000억 위안(한화 160조 원)이 넘는다. 하지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듯이 중국의 대북 경제원조는 북한의 급한 불을 끄지 못하는 수준이다. 쉽게 말해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항상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북한은 경제원조를 받고도 입이 쑥 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모습을 최근에도 발견할 수 있다. 쑨웨이둥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지난 1월 26일 평양에서 최선희 북한 외무상을 만났다. 쑨웨이둥 부부장의 방북은 지난해 12월 박명호 북한 외무성 부상이 베이징을 방문한 것에 대한 답방 성격이다. 당시 박명호 부상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났다. 실무 회의는 차관급인 쑨웨이둥-박명호가 진행하고 서로 양쪽 외교수장을 예방한 것으로 보인다.

왕이 박명호

왕이 박명호

북한은 지금 중국에 경제원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박명호 부상이 방중했을 때 중국에 요청했을 것이고, 쑨웨이둥 부부장이 방북했을 때도 한 번 더 꺼냈을 것이다. 이에 중국은 조건을 달았거나 북한이 원하는 수준의 지원에 난색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조건은 최근 북한의 도발에 대한 자제이거나 북-러 밀착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였을 것이다.

중국은 과거처럼 북한에 경제원조를 하려는 마음도 줄었고 유엔 대북제재로 인해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최우선이기에 미-중 관계를 생각하면 북한에 경제원조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중국은 미-중 관계의 강화가 대국 부흥에 득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북한의 경제원조 요청에 대한 왕이 부장과 쑨웨이둥 부부장의 답변은 뻔하다.

북‧중은 올해를 수교 75주년을 맞아 ‘조중 우호의 해(朝中友好年)’라고 선포했다. 올해 1월 1일부터 시진핑-김정은의 축전 교환을 시작으로 북한과 국경을 맞댄 랴오닝성 우호문화대표단이 지난 1월 29일 평양을 방문했다. 그리고 평안북도 신의주시와 랴오닝성 단둥시는 지난 2월 5일 신의주시에서 신년 축하 행사를 함께 열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는 하오젠쥔 단둥시장과 김종남 신의주시 인민위원장이 참석했다.

〈YONHAP PHOTO-4764〉 시진핑-김정은, 북중 우의탑 참배   (서울=연합뉴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1일 평양 모란봉 기슭에 있는 북중 우의탑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2019.6.21 [CCTV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2019-06-21 20:49:46/ 〈저작권자 ⓒ 1980-201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YONHAP PHOTO-4764〉 시진핑-김정은, 북중 우의탑 참배 (서울=연합뉴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1일 평양 모란봉 기슭에 있는 북중 우의탑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2019.6.21 [CCTV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2019-06-21 20:49:46/ 〈저작권자 ⓒ 1980-201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중국은 현재까지 문화 교류로 ‘조중 우호의 해’를 보내고 있다. 북한이 원하는 경제원조가 이뤄지려면 북‧중 정상회담이나 리창 중국 총리의 방북이 성사돼야 가능할 것 같다. 시진핑은 북-러 밀착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거의 ‘왕따’가 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손을 잡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김정은이 딴마음을 먹지 않도록 일단 축전을 교환하고 쑨웨이둥을 보내고 문화 교류도 하고 있지만, 경제원조는 여전히 보류하고 있다.

시진핑은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에 관한 생각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1949년 건국 초기부터 수십 년간 북한에 경제원조를 했지만, 북한은 앞에서 혈맹을 외칠 뿐 뒤에서는 필사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느낀 것 같다. 시진핑은 북한이 궁극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중국을 견제하려는 힘을 키울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거액의 경제원조를 쏟아부어 중국에 협조하지 않는 북한을 도와주는 것에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은 친미원북(親美遠北)을 할 수 없다. 북한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은 중국에 득이 되지 않는다. 북-중 관계가 악화하면 오히려 득을 보는 쪽은 미국이다. 중국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는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 것은 중국에도 큰 부담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항상 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이 주연을 맡고 자신은 뒤에서 협력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시나리오가 성공하면 중국은 수지맞는 장사를 하는 셈이다. 실패하더라도 북-미 관계가 악화하면 북-중 관계는 더 밀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길 수 있어서 손해를 볼 일이 아니다.

북한은 그런 중국이 야속하기만 하다. 어쩔 수 없이 사정하지만, 중국의 속마음을 알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북한은 중국을 ‘황혼의 부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더는 과거처럼 지내기는 싫지만, 오랜 세월 같이 지냈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돼 버렸다. 반면 미국은 다르다. 미국이 무섭고, 미국을 증오하지만 미국과의 관계만 개선하면 국제사회 전체와의 관계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면 지금 북한을 둘러싼 긴장된 국제환경도 조금은 변화할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은 북한에 설렘의 대상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를 위해 겉으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지만, 미국에 어느 정도 협조와 양보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이 이런 북한의 속마음을 알아주고 명분을 만들어 주길 바라고 있다.

시진핑은 이런저런 북한의 계산을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과 올해 카자흐스탄에서 열리는 상하이협력기구(SCO)의 결과를 지켜보고 북‧중 정상회담의 개최 여부를 고민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미-중 관계와 중-러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고차원의 방정식이 시진핑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북-중 관계는 종속 변수일 수밖에 없다. 잡아두려는 시진핑과 달아나려는 김정은. 그 힘겨루기 결과가 궁금해지는 갑진년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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