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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민원만 300차례...어렵게 붙은 공무원 그만두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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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강원도청 종합민원실에서 악성 민원인을 제압하는 모의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강원도]

강원도청 종합민원실에서 악성 민원인을 제압하는 모의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강원도]

서울시 자치구 주민센터(동사무소)에 근무하는 30대 주무관 A씨는 최근 휴직하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 2년 이상 공부해 합격한 공직을 그만두려고 마음먹은 건 민원인에게 받은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주민 B씨는 최근 1년 동안 A씨가 일하는 주민센터 등에 동일한 민원을 300여 차례 제기했다. 또 주민센터를 20여 차례 방문해 “민원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있다”며 항의했다. B씨는 “아파트 입주자대표자회의가 자체 추진한 사업 관련 견적서 등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라며 “주민센터가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민센터가 나설만한 법적 근거가 약했다는게 구청측 설명이다. B씨는 ‘A씨가 소극행정을 했다’며 자치구에 감사를 청구하자 A주무관은 공황장애까지 겪었다고 한다.

자치구 관계자는 “A 주무관처럼 과도한 민원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휴직을 신청하는 공무원이 한둘이 아니다”라며 “민원 처리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공무원을 괴롭히는 건 정말 곤란하다”고 하소연했다.

악성 민원인에 시달리는 공무원

연도별 9급 공무원 공개채용 경쟁률. 그래픽=신재민 기자

연도별 9급 공무원 공개채용 경쟁률. 그래픽=신재민 기자

공직에 대한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지원자가 갈수록 줄고,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돼 포기하는 공직자도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은 20~30대 이른바 ‘MZ 세대(밀레니얼+Z세대)’ 공무원에 심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공직 인기가 시들해진 원인에는 낮은 보수와 경직된 조직 문화 못지않게 A주무관이 겪은 것처럼 악성 민원이 꼽힌다.

18일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최근 접수한 올해 국가공무원 9급 공개경쟁 채용시험에는 4749명 모집에 10만3597명이 지원, 21.8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1992년(19.3대 1) 이후 32년 만에 가장 낮은 경쟁률이다. 공무원연금공단에 따르면 2018년 5166명이던 3년차 미만 퇴직 공무원 수는 2022년 1만2076명으로 2배가 됐다.

갈수록 증가하는 초임 공무원 퇴직자. 그래픽=김주원 기자

갈수록 증가하는 초임 공무원 퇴직자. 그래픽=김주원 기자

악성 민원 유형은 다양하다. 전국시군구공무원노동조합연맹이 지난해 12월 공무원 187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9명은 최근 6개월간 혼잣말 욕설 등 폭언(88.9%)을 경험했다. 반복 전화(85.8%), 장시간 전화(85.4%), 인격 모독(80.8%) 등도 공무원이 자주 경험하는 악성 민원 사례로 꼽혔다.

실제로 충북 청주시에선 지난 1월 공무원을 폭행한 민원인이 법정구속 됐다. 그는 기초생활수급비가 적게 나왔다는 이유로 난동을 부리고 주민센터 담당 공무원에게 욕설·협박을 했다. 청주지법은 공무집행방해와 폭행 혐의로 해당 민원인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경기도 파주에서도 지난달 민원인이 파주시청 공무원 머리를 둔기로 때린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이 남성은 동일한 민원을 1000회에 걸쳐 제기하고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면서 담당 공무원을 살해한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지난해 7월에는 경기도에서 세무공무원이 악성 민원인을 응대하다가 숨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서류 발급을 위해 방문한 민원인이 고성을 지르며 항의하자 실신한 공무원은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김준모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는 “보수나 조직문화는 공직 입문 전부터 대략적인 수준을 알지만, 악성 민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는 걸 뒤늦게 체감하고 이직을 결정하는 공무원이 종종 있다”고 설명했다.

악성 민원인에 공무원 “그냥 참아”

이직 의향 있는 공무원 비율. 그래픽=김주원 기자

이직 의향 있는 공무원 비율. 그래픽=김주원 기자

지자체 등에서 민원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공무원이 늘어나고 있지만, 참고 넘어갈 때가 많다고 한다. 인사혁신처가 지난해 2월 공무원 1만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공무원 감정 노동에 대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61.1%는 악성 민원에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소극적인 대처는 공무원 스트레스를 키우고 자존감을 낮춰 업무 효율을 저해한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결국 퇴직을 선택한다. 이런 현상은 지자체 중에서 공직 지망생에게 상대적으로 인기가 있는 서울도 마찬가지다. 옥재은 서울시의회 행정자치위원회 위원(국민의힘·중구2)에 따르면, 2019년 4.7%였던 서울시 저년차(5년이하) 공무원 의원면직률은 2022년 8.6%로 증가했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하위직 공무원이 현장에서 모든 민원을 도맡아 처리하는데, 책임까지 오롯이 질 때가 많다. 이와 같은 조직문화도 최근 공무원 퇴사 증가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에서 교사들이 악성민원인 강경 대응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에서 교사들이 악성민원인 강경 대응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와 함께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기 어려운 일부 부서에서 일하는 공무원도 업무 만족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폭설·폭우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공무원을 투입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공무원은 명령어를 입력하면 일하는 인공지능(AI)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공직생활실태조사’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엿보인다. 공무원 6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 결과 응답자의 45.2%가 ‘기회가 되면 이직할 의향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이들 중 재직 기간 5년 이하인 20~30대(6~9급) 공무원 가운데 65.3%가 이직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이런 가운데 낮은 처우는 줄곧 지적된 문제다. 실제로 2022년 민간 대비 공무원 보수 수준은 역대 최저 수준(83.1%)을 기록했다. 100인 이상 사업체 사무관리직이 100만원을 받는다면, 공무원은 83만100원 정도를 받는다는 뜻이다.

경직된 조직문화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익명을 요청한 서울시 공무원은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일부에선 여전히 보고서 양식을 깐깐하게 따지고 장시간 회의도 잦은 편”이라며 “지나치게 형식적인 문구 따지는 일이나 회의 시간만 줄여도 삶의 질이 좋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공직사회 구조를 바꾸고 악성 민원에 단호히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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