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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시각각

기억에 오래 남을 졸업식 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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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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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모어하우스 칼리지는 흑인운동의 대부 마틴 루서 킹 주니어와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의 모교다. 2019년 5월 이 학교 졸업식에 투자회사 비스타 에쿼티 파트너스의 CEO 로버트 스미스가 나와 축사를 했다. 당대 흑인 중 가장 부자가 흑인 학생이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학교에서 성공 스토리를 전해 주는 구도는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연설은 파격이었다.

2019년 애틀랜타 모어하우스 컬리지 졸업식에서 로버트 F 스미스가 축사를 하고 있다. 그는 연설 도중 졸업생들의 학자금 대출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파격 선언을 해 학생들의 환호를 받았다. 연합뉴스

2019년 애틀랜타 모어하우스 컬리지 졸업식에서 로버트 F 스미스가 축사를 하고 있다. 그는 연설 도중 졸업생들의 학자금 대출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파격 선언을 해 학생들의 환호를 받았다. 연합뉴스

“여러분 버스에 연료를 조금 넣어드리겠습니다. 우리 가문은 자금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학자금 대출을 없애기 위해서요.” 사전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나온 학자금 상환 깜짝 발표에 졸업식장은 감격과 환호에 휩싸였다. 스미스의 연설은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졸업식 축사로 꼽힌다.

이효리 연설, 형식 파괴로 화제
윤 대통령 축사 중 졸업생 항의
‘입틀막’ 퇴장 장면 오래 기억될 듯

매년 미국 대학 졸업식 연단에 선 유명 인사들의 축사가 여론의 주목을 받곤 한다. 2005년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에서 한 연설도 그중 하나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가 대학 자퇴”라고 말했지만 “초심을 잃지 말고 우직하게 나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말로 졸업생들을 격려했다.
『해리포터』를 쓴 작가 조앤 롤링의 2008년 하버드대 축사도 유명하다. 연간 수천억원의 인세를 받는 그가 “실패하는 게 두려워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실패”라며 실패의 미학을 역설했다. “C학점 받은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섰다”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남부감리교대(SMU) 연설이나, 배우 로버트 드니로의 “여러분은 해냈습니다. 그리고 X됐습니다”라고 한 뉴욕 예술대 연설처럼 유머 넘치는 연설도 있다.
한국에서는 좀 다른 역사가 있다. 1970~80년대 국내 대학은 시위가 일상이었다. 졸업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7년 서울대 졸업식에선 교육부(당시 문교부) 장관이 연단에 오르자 졸업생들이 집단 퇴장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서울대는 외부인 초청을 중단하고, 행사 이름도 학위 수여식으로 바꿨다. 학위증서와 상을 받는 몇몇 대표를 제외하곤 교정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졸업식을 대신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울대 졸업식에 가면서 문화는 다시 바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울대에서 연설했고,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나 최재천 교수처럼 유명 동문의 연설도 회자한다.

가수 이효리가 2월 14일 서울 성북구 국민대학교에서 열린 '2023학년도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하던 도중 자신의 히트곡 '치티치티 뱅뱅'을 부르고 있다. 이효리는 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 연극영화전공 98학번으로 지난해 9월 국민대 축제에도 깜짝 방문한 바 있다. 뉴스1

가수 이효리가 2월 14일 서울 성북구 국민대학교에서 열린 '2023학년도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하던 도중 자신의 히트곡 '치티치티 뱅뱅'을 부르고 있다. 이효리는 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 연극영화전공 98학번으로 지난해 9월 국민대 축제에도 깜짝 방문한 바 있다. 뉴스1

올해 졸업식 시즌의 최대 화제는 가수 이효리의 국민대 연설이었다. 이 학교 98학번인 이효리는 “인생은 독고다이다 하시면서, 쭉~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며 거침없이 속어를 썼다. 또 자신의 노래 ‘치티치티 뱅뱅’을 부르며 춤으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현역 시절부터 연예계 공식을 따르지 않았던 자신의 스타일처럼 투박하고 형식을 깬 연설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지난 16일 또 한 번 화제의 졸업식 축사가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의 KAIST 연설이다. 윤 대통령 연설 도중 졸업생 한 명이 일어나 “생색내지 말고 R&D 예산 복원하십시오”라고 외친 것이다. 그러자 순식간에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들어 내쫓았다.

2월 16일 오후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항의하다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하고 있다. 이 졸업생은 윤 대통령 축사 도중 일어나 삭감한 R&D 예산을 돌려놓으라고 외쳤으며, 곧바로 경호원들이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들어 행사장 밖으로 끌어냈다. 뉴스1

2월 16일 오후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항의하다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하고 있다. 이 졸업생은 윤 대통령 축사 도중 일어나 삭감한 R&D 예산을 돌려놓으라고 외쳤으며, 곧바로 경호원들이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들어 행사장 밖으로 끌어냈다. 뉴스1

쫓겨난 학생은 녹색정의당 대변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학위를 받고 졸업식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갑작스러운 연구개발(R&D) 예산 14% 삭감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KAIST라는 점도 달라질 바 없다. 멀리 떨어져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대통령 행사에서 이런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경호의 원칙을 체감했다.
학생이 일어서기 직전 대통령이 하던 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십시오.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제가 여러분의 손을 굳게 잡겠습니다”는 것이었다. 과감하게 도전했지만, 손발과 함께 입도 잡혔다. 소란은 10여 초 만에 끝났고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졌다. “과학계의 퀀텀 점프를 위해 예산을 대폭 늘리겠습니다.” 이날 연설은 말과 현실의 부조화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