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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 종교의 삶을 묻다

마음의 눈으로 풀어내는 도마복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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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예수의 메시지는 처음에 여기저기 쪽지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혹은 갈리리 호숫가에서, 혹은 사마리아 땅에서 예수가 건넸던 이야기를 사람들이 기록한 겁니다. 이런 쪽지의 파편들을 모으고, 편집하고, 또 정리해서 복음서가 꾸려졌습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그리스도교는 국교가 됐습니다. 그때 정리 과정을 거쳐 4복음서(마가·마태·누가·요한복음)도 정경(正經)으로 공인을 받았습니다.

4복음서 정리 과정서 빠진 쪽지
예수 육성 담겼을 가능성 주목
명상가 목사가 쓴 해설서 눈길
암호 같은 도마복음 길라잡이

요한복음과 결이 닮은 도마복음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직설을 담았다는 어록이 기록 돼 있다. 그런데도 로마 시대 때 정경으로 채택되진 못했다. 지금도 ‘도마복음’은 그리스도교에서 외경이나 위경으로 불린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에 있는 예수 조각상. 백성호 기자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직설을 담았다는 어록이 기록 돼 있다. 그런데도 로마 시대 때 정경으로 채택되진 못했다. 지금도 ‘도마복음’은 그리스도교에서 외경이나 위경으로 불린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에 있는 예수 조각상. 백성호 기자

이 과정에서 빠진 쪽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걸 ‘외경(外經)’ 혹은 ‘위경(僞經)’이라고 부릅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도마복음’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도마복음’의 생성 연대가 4복음서 못지않게 오래된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도마복음’ 속에 예수의 직설이 담겼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정경으로 불리는 4복음서 중에서 가장 개성이 강한 건 ‘요한복음’입니다. 왜냐고요? 거기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는 신비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묵상적이고, 철학적이고, 수도적인 요소가 짙게 깔린 복음서가 요한복음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도마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는 ‘요한복음’과 결이 닮았습니다. ‘도마복음’은 다분히 영성적인 글입니다. 분량도 많지 않습니다. 예수의 어록을 모은 글이라 구성도 간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복음’은 풀이가 쉽지 않은 텍스트로 꼽힙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읽어야 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도마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가 마음의 눈으로 건넨 메시지이기 때문이겠지요. 로마 시대 때 ‘도마복음’이 정경에서 빠진 이유도 해독이 어려운 암호 문서로만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동화작가이자 목사가 쓴 해설서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 교회. 숨진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 눕혔다는 돌판 앞에서 순례객 이 기도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 교회. 숨진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 눕혔다는 돌판 앞에서 순례객 이 기도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얼마 전에 눈길을 끄는 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관옥 이현주의 토마복음 읽기』. 동화작가이기도 한 이현주 목사가 ‘도마복음’에 감상과 풀이를 달았습니다. 감리교 목사인 그는 명상가이자 영성가로 통합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무위당 장일순(1928~94) 선생과 함께 공부도 했습니다. 그때 무위당 선생에게서 ‘관옥구인(觀玉救人)’이란 이름도 받았습니다. ‘하느님(하나님)을 뵙고 세상을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목사는 하늘을 만난 눈으로, 세상을 안는 마음으로 ‘도마복음’을 풀어갑니다. 그는 서문에서 “이 글은 토마복음 해설도 아니고 주석도 아니다. 그냥 토마복음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될수록 간결하게 달아본 것이다”라고 낮추어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놓아둔 징검다리를 밟고, 그가 풀어놓은 소리를 따라서 사람들이 ‘도마복음 속 예수’를 만나기에 무척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도마복음’의 첫 장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 이 말씀들의 풀이를 발견하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그냥 단순히 믿으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오히려 깨치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말씀이니, 그걸 깨칠 때 우리도 생명이 된다고 말합니다.

묵상 끝에 풀어내는 이 목사의 감상은 이렇습니다. “말의 뜻을 이해하는 길은 머리에서 몸으로 이어진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살기가 앎으로 통하는 유일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생명을 보고 생명에 먹혀 생명으로 된 사람이 어떻게 죽음을 맛볼 수 있겠는가?”

이 목사의 글은 짧지만, 울림은 참 깁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는 예수의 말씀에 담긴 생명을 보고, 그 생명에 먹히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비로소 생명으로 살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 대목을 읽다 보면 ‘하나 됨’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할 때의 그 하나 됨이 어떤 하나 됨인지 묵상케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

‘도마복음’에는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 종종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셨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 그에게 하늘나라가 속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산상수훈에도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다들 부자가 되길 원하는데, 예수는 왜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했을까요.

이런 물음에 이 목사는 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내 것이라고 할 아무것도 없으셨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본디 가난한 사람이다. 이것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여 소유할 수 있는 무엇도 원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란 본디의 자기로 돌아간 사람이다. 스스로 가졌다고 착각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알몸으로 돌아온 탕자. 아버지는 그를 가리켜 ‘죽었다가 살아난 자식’이라고 말한다.”

이 목사의 풀이를 쭉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도마를 만나고, 도마가 말하는 예수를 만나고, 예수가 말하는 가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 가난 속에 깃든 하늘나라도 묵상하게 되지요. 그 와중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암호 덩어리로 불리던 ‘도마복음’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옵니다. 저는 그 또한 ‘신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신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