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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한슬의 숫자읽기

‘삼식이’와 헤어질 결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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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한슬 약사·작가

박한슬 약사·작가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선 ‘나리타의 이별’이란 말이 유행했다. 장성한 자녀들이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신혼여행을 떠나는 순간, 부모로서의 책무를 완성했다고 여긴 부부들이 그간 유예했던 황혼이혼(黃昏離婚)을 결행하는 모습이 자주 관찰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웃 나라의 독특한 문화현상이라는 흥밋거리로 국내에 소개됐지만, 20년이 흐른 지금은 우리가 당사자가 됐다.

황혼이혼의 정의는 제각각이지만, 혼인한 지 30년이 넘은 부부가 이혼하는 것으로 좁혀보더라도 증가 추이는 분명하다. 2000년 2500여 건에 불과하던 황혼이혼은 20여 년이 지난 2022년에는 1만6000여 건으로 6배가량 껑충 뛰었다. 주목해야 하는 점은 같은 시기 전체 이혼 건수는 되레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4년 이내 신혼부부의 이혼 건수는 연간 3만5000건에서 1만7000건으로 절반으로 줄었고, 15년에서 19년 차 부부들의 이혼 건수도 1만8000건에서 1만1000건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노년의 이혼만 전반적 이혼 감소 추이를 거스르며 늘어난 것이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노년 여성들이 이혼을 결심하는 이유는 국경과 무관하게 한결같다. 가부장적인 남성이 가정에서 권위적으로 군림하다, 남편의 은퇴 시점이 도래한다. 남편이 가정에 가져오던 소득은 줄고, 가사 부담은 더 커진다. 하루 세끼를 모두 차려줘야 한다는 이유로 ‘삼식이’라 불리는 권위적인 남편들을 마주하는 스트레스가 더 커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문화분석만으론 황혼이혼의 급증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지금은 과거보다 보수적 분위기가 되레 더 옅어졌기 때문이다.

국내외의 황혼이혼 연구들을 살펴보면, 노년기 이혼의 급증 이유는 이혼과 관련된 제도변화와 관계가 깊다. 대표적인 예가 이혼 시 재산분할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재산분할 제도가 국내에서 도입된 건 1991년부터인데, 관련 제도가 생기자 이혼 직전에 재산을 타인 명의로 빼돌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를 방지하는 법률 개정은 2007년에야 이루어졌고, 2014년엔 미래에 받을 퇴직금과 공무원 연금 등도 재산분할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까지 나오게 됐다. 최근엔 민간보험사에서 개발한 연금형 상품이나 사회보험에서도 연금분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어, 재산분할의 범위와 규모는 현재도 계속 넓혀지는 추세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제도변화가 이혼을 인위적으로 조장(助長)한 게 아니란 점이다. 바뀐 법은 이미 파탄 난 혼인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던 이들이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하게 해준 게 전부다. 노년의 돈 걱정이 줄어서다. 그런데도 ‘삼식이’들은 애꿎은 제도변화를 탓한다. 바뀌어야 할 사람이 안 바뀌니, 법이 대신 바뀐 지도 모르고 말이다.

박한슬 약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