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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여성 1호 통일연구원 "내 최고 호사는 명품가방 아닌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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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통일연구원의 탈북 여성 공채 1호 부연구위원 조현정 박사. 지난 2일 중앙일보와 인터뷰 중이다. 우상조 기자

통일연구원의 탈북 여성 공채 1호 부연구위원 조현정 박사. 지난 2일 중앙일보와 인터뷰 중이다. 우상조 기자

서울 서초구 반포동 통일연구원 7층의 한 연구실에 들어서면 '빨강 머리 앤' 그림이 반겨준다. 지난달 15일 근무를 시작한 조현정 부연구위원의 연구실이다. 그는 탈북 여성으론 처음으로 통일연구원 공채 명함을 받은 주인공이다. 그 앞에서 "고생했다" "힘들다"는 말은 꺼내기 어렵다. 어린 시절 모친을 여의고, 탈북과 북송을 경험했으며, 2003년 각고 끝 한국 땅을 밟았다. 주경야독으로 박사학위를 따고, 통일연구원엔 재수 끝 입성했다. 그의 표정엔 고생을 삶의 단계로 수용하고, 성장의 계기로 치환한 이들이 내는 빛이 서려 있다.

그의 롤모델이 '빨강 머리 앤'이다. 그는 "마흔에 만난 앤은 내 삶의 등대"라며 "가난한 고아 앤이 웃음을 잃지 않고 삶을 개척하는 불굴의 모습에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지난 2일 진행한 일문일답 요지.

'빨강 머리 앤'의 한 장면. [중앙포토]

'빨강 머리 앤'의 한 장면. [중앙포토]

통일연구원 도전 계기와 과정은.  
"북한 연구자들은 누구나 꿈꾸는 국책연구기관인데 감회가 새롭다. 어린 시절 생각하면 (침묵) 한숨부터 나온다.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어머니가 아프시다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보육원 생활도 했고, 할머니 손에 컸다. '부모 없어서 막돼먹었다'는 말은 듣기 싫었다. 북한 학교에선 '토끼 가죽 가져오라'는 등의 과제가 많다. 한 번도 (날 키워주신) 할머니께 그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내가 다 해결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징징거릴 생각 자체를 못했다. 지금도 '할 거면 말없이 하고, 안 할 거면 처음부터 하지 말자'고 생각한다."  
조현정 박사의 통일연구원 사무실에 걸린 '빨강 머리 앤' 그림과 은사의 선물, '학해무변'(학문의 바다엔 끝이 없다) 서예 액자. 우상조 기자

조현정 박사의 통일연구원 사무실에 걸린 '빨강 머리 앤' 그림과 은사의 선물, '학해무변'(학문의 바다엔 끝이 없다) 서예 액자. 우상조 기자

탈북 과정은.  
"두만강을 처음 넘은 게 1997년이었다. 당시엔 중국에서 장사 밑천을 만들려고 했다.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고, 선생님의 꿈은 묻었다. 그러다 생존을 위해 광산에서도 일했다. 문제는 중국에서 느낀 자유의 맛이다. 정보가 차단된 사회에서 자꾸 그 맛이 떠오르더라. '고난의 행군(1990년대 북한의 식량 위기로 아사자가 대량 발생)'도 겼었고...우물 안 개구리가 싫었다. 99년에 다시 나왔다가 북송됐지만 그래도 (북에서) 살 수가 없었다. 곡절 끝에 2003년 한국에 왔다."  
한국 적응은 어땠나.
"새 세상에 왔으니 치열하게 살며 보람을 느끼고 싶었다. 인생은 한 번뿐, 연습이 없다. 우선 돈을 벌고 싶었다. 아르바이트 해 본 게 30개는 족히 넘는다. 햄버거ㆍ옷ㆍ정수기 등 많이 팔아봤고, 화장품 방(문)판(매)도 해봤다. 자본주의는 돈이 있어야 하니까. 부자가 한번 돼보고 싶더라(웃음). 그런데 그렇게 5년 정도 지나니, 성찰의 시기가 왔다."  
건강이 안 좋아졌나.  
"건강도 그랬고, 할머니가 해줬던 얘기가 떠오르는 거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말. 골프장으로 이직하고 캐디 일을 하면서 방송통신대에 들어갔다. 선생님이란 꿈을 떠올리고 청소년 교육을 전공했다. 집에 돌아오면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마음만큼은 날아갈 것 같았다.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 공부를 한다는 것이 즐겁더라. 그 전엔 자신감은 높았지만,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지만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자존감이 채워졌다. 지금도 내가 누리는 최고의 호사는 명품 가방이 아니라 책이다."  
통일연구원의 대형 백두산 천지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한 조현정 박사. 우상조 기자

통일연구원의 대형 백두산 천지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한 조현정 박사. 우상조 기자

학자로 인생 항로를 틀었는데.
"지식을 쌓는 것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가 절감하며 졸업 논문을 쓰는 데, 결국 북한 관련 주제를 찾게 되더라. 나의 정체성을 벗어날 수 없겠구나, 생각하고 다음 단계 학위로는 북한학을 찾았고, 이화여대를 들어갔다. 탈북한 사람들이 오히려 북한을 잘 모른다. 내가 온 곳을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검색을 통해 북한학과가 있는 걸 알게 됐고, 지원했다. 어느 대학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학의 레벨이 나의 레벨은 아니니까."  
입국 당시 다른 탈북민들과는 달리 민낯을 드러내 화제였다.  
"내가 선택해서 여기에 왔으니 나를 드러내자는 마음으로 그랬는데, 너무 튀었던 것 같다(웃음)."  
통일연구원 조현정 박사가 2003년 8월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습. 홀로 마스크 및 선글래스 착용을 하지 않고 당당히 얼굴을 드러냈다. 연합뉴스

통일연구원 조현정 박사가 2003년 8월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습. 홀로 마스크 및 선글래스 착용을 하지 않고 당당히 얼굴을 드러냈다. 연합뉴스

적응이 쉽진 않았을 텐데.  
"한국 내에서도 서로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있지 않나. 북에서 온 사람은 오죽하겠나. 모멸감도 느꼈지만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언어가 특히 힘들었다. 내 억양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위아래로 훑어본다. 죄인이 된 것 같은 순간이다. 이를 악물고 억양 연습을 많이 했다. 물러나고 싶지 않았고, 견디고 견디고 견뎌서(그는 이 말을 약 8번 반복했다) 조금씩 성취를 해냈다."  
탈북민 숫자가 3만명을 넘겼는데. 조언은.  
"조심스럽다. 개인의 성향 차가 있으니. 하지만 적어도, 열심히 살아내려는 친구들에겐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듯, 좋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좋은 결과가 반드시 온다. 자신감도 가지길 바란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잘 안 되면? 그건 세상이 잘못된 거다. 긍정적으로, 진취적으로 살기를 바란다."  

그에게 통일연구원은 끝이 아니다. 연구원으로 정년을 맞은 뒤의 삶을 위해 또다시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업무 시간 외에 경영대학원 석사(MBA) 취득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고, '코칭학'이라는 것도 연구 중이라고 한다. 그는 "인생이 힘에 부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며 "그분들을 위해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코칭학 관련 자격증을 1단계는 이미 취득했고 더 높은 단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빨강 머리 앤'과 같은 존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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