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친딸 죽이라는데 좋아하는 막장 엄마…그곳엔 이미 모성 사라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자기 딸을 죽이라는 청부살인 제안을 받았을 때도 엄마의 눈은 돈 욕심에 반짝였다. 덤프트럭으로 자기 딸을 죽이러 간 내연남을 기다리며 “쾅 부딪히면 끝나는 건데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 안절부절못한다. 살인을 사주한 내연남의 딸마저 “쾅 하면 끝나는 게 아줌마 딸 인생인데 그런 건 걱정 안 되냐”며 기막혀하지만 “천륜보다 무서운 건 돈”이라며 머뭇거림조차 없다.

지난 12일 방송된 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 13회의 한 장면이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지원(박민영)이 겪는 갖가지 고난의 근원은 엄마다. 바람 난 엄마가 가출한 이후, 엄마의 내연남 딸 수민(송하윤)의 어긋난 복수심에 평생을 시달린다. 20년 가까이 연락 한 번 없더니 지원이 재벌 3세를 사귄다는 얘기에 찾아가 “너 돈 좀 있냐”고 묻는 엄마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엄마. 딸 살인을 제안을 받으면서도 돈을 보고 반색하는 모습이다. [사진 tvN]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엄마. 딸 살인을 제안을 받으면서도 돈을 보고 반색하는 모습이다. [사진 tvN]

'내남결' '정신병동에도…' 등
패륜 일삼는 막장엄마 잇따라
혈연 중심 가족문화 해체 신호
"부양의무 기피심리 반영" 분석

가족을 위해 헌신·희생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아이콘. 이랬던 엄마 상(像)의 붕괴, 모성 신화의 균열이다. 최근 1년 새 방영된 드라마들에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학폭 피해자의 속 시원한 복수극으로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동은(송혜교)의 엄마도 비슷했다. 끔찍한 폭력을 당한 딸에게 남보다 못한 존재였다. 가해자 측의 회유에 넘어가 딸의 자퇴 사유를 ‘부적응’으로 바꿨고, 그 합의금을 들고 내연남과 야반도주했다. 초등 교사가 된 동은의 반 학부모들을 만나 촌지를 뜯어내고 행패를 부린 건 학폭 주동자 연진(임지연)의 사주를 받아서였다.

웹툰 원작의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선 간호사 들레(이이담)의 엄마가 그랬다. 도박과 남자에 빠진 엄마는 딸을 방치한다.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벌어야 했던 딸이 간호사가 되자 딸 명의로 대출을 받아 도박에 탕진했다. 딸은 그 빚을 갚느라 온수도 안 나오는 옥탑방에서 무채색 삶을 이어가지만, “엄마 노후는 네가 책임지라”며 시종일관 뻔뻔스럽다. 급기야  딸이 사귀는 의사를 찾아가 “천만원만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드라마 속 이 엄마들은 모두 친엄마다. 과거의 설정이라면 계모가 맡았음직한 역할이다. 자식을 버린 엄마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서사를 부여했던 ‘동백꽃 필 무렵’(2019), ‘마더’(2018) 등 기존 드라마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관이다.

'더 글로리'의 막장 엄마.  [사진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막장 엄마. [사진 넷플릭스]

마무리도 다르다. 반성과 화해로 이어지는 과거 가족극식 해피엔딩은 이제 없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지원은 엄마에게 “나 엄마 없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쭉 없을 것”이라고 못 박고 돌아섰다. ‘더 글로리’의 엄마는 동은이 평생을 별러온 응징과 복수의 타깃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갇힌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들레는 정신과 의사인 남자친구의 “어머니를 버리라”는 조언을 받아들인다. 모두 깨끗한 단절로 결론 내렸다.

모성 판타지의 붕괴는 모성이 지탱하고 있던 혈연 중심 가부장적 가족 문화의 해체를 의미한다. 안방극장이 메인 무대인 드라마는 대중문화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장르다. 사회 변화를 가장 늦게 따라간다. 합계출산율 0.7명대에 1인 가구 비율 34.5%. 핵가족을 넘어 핵개인의 시대로 들어간 실제 세상에선 이미 사라진 판타지였는지 모른다. 드라마 속 ‘막장 엄마’의 등장은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면서 동시에 가부장제를 옹호·강화하는 역할을 했던 모성 신화의 시효 소멸을 보여주는 일종의 시그널이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화해 없는 결말에 더 주목했다. “저출생·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젊은 세대가 미래의 빚으로 짊어지게 된 현실에서 차라리 부모 세대에게 안 받고 부양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엄마 역할에 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 욕망의 분출이라기보다 효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는 세태의 반영이란 뜻이다.

가상세계 속 나쁜 엄마의 시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데이아다. 바람 난 남편에 격분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였다. 남편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복수할 방법으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메데이아 이후 딱히 계보를 이을 수 없었던 나쁜 엄마 캐릭터가 흥행 코드라도 되는 양 잇따라 등장하는 상황이 낯설다. 이제 엄마의 정마저 떼버린, 고독한 개인만 남았다. 이들의 내일은 고립과 외로움의 일상화일까, 아님 사회적 연대를 통한 대안 마련일까.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모두에 놓인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