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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쏟은 70대, 한쪽선 "왜곡" 한숨…둘로 쪼개진 '건국전쟁' 후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3일 오후 2시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영화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의 엔딩 크레딧이 서서히 올라가는 중이었다. 3열에 앉은 한 70대 남성이 갑자기 뒤돌아 박수를 유도하자, 극장은 우렁찬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한 중년 여성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전체 89석 규모의 영화관은 평일 점심 무렵인데도 75명의 관객이 자리할 정도로 붐볐다. 중장년층과 머리가 희끗희끗한 고령층이 대다수였다.

이날 극장을 찾은 김광수(72)씨는 “이 시간대 자리가 거의 남지 않아 겨우 예약했다”며 “이승만 대통령 업적이 많아 젊은 사람들도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반면에 영화를 보는 내내 한숨을 푹푹 내쉰 50대 박모씨는 “이승만이 IT 강국을 만들었다고 나오는데 그건 김대중 아이디어 아니냐”며 “왜곡이 있을 줄은 짐작했지만 너무 심하다”고 말했다.

1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영화관에서 관람객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재평가한 영화 〈건국전쟁〉 상영을 기다리고 있다. 이아미 기자

1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영화관에서 관람객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재평가한 영화 〈건국전쟁〉 상영을 기다리고 있다. 이아미 기자

이 전 대통령을 재평가한 〈건국전쟁〉이 흥행 조짐을 보이면서 22대 총선을 앞두고 진영 간 ‘역사전쟁’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1일 개봉한 〈건국전쟁〉은 이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농지개혁과 같은 업적을 부각하고 세간의 부정적 평가를 반박하는 데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다. 13일 기준 누적 관객수는 32만명,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인 흥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CGV가 제공한 연령별 예매 분포에 따르면, 50대가 45.7%로 가장 많고 이어 40대(26.1%), 30대(19.4%), 20대(7.9%)의 순으로 집계됐다.

여권도 가세하면서 역사전쟁에 불을 붙였다. 13일 정치권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건국전쟁〉을 두고 참모들에게 “대한민국 건국 과정과 그 중심에 서있었던 우리나라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라고 호평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2일 건국전쟁 관람 후 “그분(이 전 대통령)의 모든 것이 미화돼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시대적 결단이 있었고, 그 결단에 대해 충분히 곱씹어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장관, 나경원 전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 여권 유력 인사들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앞다퉈 관람 후기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후기를 남긴 정치인과 연예인 등을 향한 비난 세례도 줄을 잇고 있다. 가수 나얼은 자신의 SNS에 〈건국전쟁〉 포스터 사진과 성경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자 야권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나얼을 비난하는 글이 쇄도했다. 이날 오후 9시쯤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는 ‘나얼2찍(보수 지지자) 인증이네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고 130여개 댓글이 달렸다. 나얼의 인스타그램에도 “그렇게 안 봤는데 정이 뚝 떨어진다” 등 악플이 달렸고, 결국 나얼은 댓글 창을 폐쇄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영화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관람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영화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관람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권을 중심으로 한 이 전 대통령 재평가를 두고 시민 반응은 엇갈렸다. 친구들과 극장을 찾은 이모(73)씨는 “벌써 두 차례 관람하는데 처음 볼 때는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아냈다”며 “설날엔 손자·손녀를 대동해 온 가족이 관람했는데 젊은 층들이 역사를 바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0년 전 탈북한 김광섭(80)씨는 “탈북민 지인끼리 영화를 봤는데 뭉클했다.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반면에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조모(32)씨는 “헌법에서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는데, 4·19에 책임이 있는 이승만의 과오를 축소하는 움직임에 동의하기 어렵다”며 “정치권이 총선을 앞두고 미래지향적 의제 대신 케케묵은 정체성 다툼이나 하려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날 20·30 ‘넥타이 부대’ 20여명도 서울 양천구의 한 영화관을 찾았다. “회사에서 시켜 단체 관람을 왔다”며 시큰둥하게 답한 이들 대다수는 상영 시간 내내 숙면을 취했다.

가수 나얼이 영화 ‘건국전쟁’ 포스터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쇄도하는 악플에 댓글창을 폐쇄했다. 나얼 인스타그램 캡처

가수 나얼이 영화 ‘건국전쟁’ 포스터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쇄도하는 악플에 댓글창을 폐쇄했다. 나얼 인스타그램 캡처

이승만 전 대통령 관련 진영 간 역사전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갈등이 법정까지 번지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이 대표적이다. 진보 성향 역사단체 민족문제연구소가 2012년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를 시민방송(RTV)이 수십차례 방송했다. 여기서 이 전 대통령을 ‘부도덕한 플레이보이’ 등으로 묘사한 내용이 문제가 됐다. 방통위는 그해 8월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공정성·객관성·명예훼손 금지)을 위반했다며 프로그램 관계자를 징계하라고 RTV에 명령했다. 이에 RTV가 불복해 낸 소송에서 1·2심 재판부는 “제작 의도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배제해 사실을 왜곡했다”며 방통위 제재가 적법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2019년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RTV의 손을 들어줬다. 전합은 7 대 6으로 팽팽히 엇갈렸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면서 하급심 결론이 뒤집혔다. 당시 김명수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7명은 “역사적 사실과 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다양한 여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라는 다수의견을 냈다. 반면에 조희대 현 대법원장을 포함한 6명은 “방송 자체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아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원래 영화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진보의 전유물이었는데 이번엔 보수가 선공에 나선 셈”이라고 분석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 대만 등 다른 나라에서도 역사전쟁이 선거철마다 계속되고 있다”며 “반복될 수밖에 없는 문제인데, 논의를 피하기보단 날조 대신 팩트를 중심으로 서로 건전하게 겨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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