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외국계 은행들 국내은행 인수 '물밑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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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외국 자본이 국내 은행산업에 또 한차례 지각변동을 몰고 오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의 1차 지각변동을 외국계 투자펀드가 주도했다면, 이번 2차 변동은 외국계 대형 은행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외국계 펀드들은 헐값에 나왔던 국내 은행을 리모델링해 비싼 값에 되팔 속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투자펀드는 충분한 차익을 얻었다고 판단했는지, 손에 넣었던 한미.제일은행을 최근 매물로 내놨다. 이번에는 스탠더드 차터드와 HSBC 등 내로라하는 외국계 정통 은행들이 나섰다. 이들 외국계 은행은 전국 영업망을 갖춘 국내 시중은행을 인수해 제대로 된 은행업으로 돈벌이를 해보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에 국민.신한.우리 등 토종은행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선진 금융기법과 풍부한 자금력으로 무장한 외국계 은행이 국내 소매금융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면 가계.카드 대출 연체로 휘청하고 있는 토종 은행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토종 은행들도 추가 합병으로 '맞불'을 놓을 가능성도 있다.

◆인수전 나선 외국계 은행=지난 8월 영국계 스탠더드 차터드 은행이 삼성그룹의 한미은행 지분 9.79%를 인수하며 칼라일에 이어 2대 주주로 부상한 게 신호탄이었다. 스탠더드 차터드는 현금을 비축하며 한미은행 인수에 총력전을 펼칠 태세를 갖췄다.

또 다른 영국계 은행인 HSBC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HSBC는 칼라일에 한미은행 인수 의사를 밝히는 한편 제일은행의 대주주인 뉴브리지캐피털과도 접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계 은행이 전국 지점망을 갖춘 시중은행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국내 금융산업의 잠재력을 그만큼 높게 보기 때문이다. 선진국 사례를 보면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수록 선진 금융상품에 대한 수요가 다양하게 확대된다.

특히 외국계 은행은 장기주택대출(Mortgage Loan) 시장에서 풍부한 영업 노하우를 갖고 있다. 외국계 은행이 노리는 주 공략대상은 부자 고객들이다. 이들이 덩치 큰 우리금융지주나 하나은행보다 한미.제일은행을 인수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미은행 하영구 행장은 "외국계 은행은 전국적인 영업을 하더라도 주된 타깃은 부자 고객이기 때문에 수도권과 주요 지방도시에 지점망이 몰려 있는 중간 크기의 은행을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금융계 지각 변동=지금도 씨티은행은 12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에 2백~3백개의 지점을 갖춘 시중은행이 외국계 은행에 넘어간다면 영업 판도는 확 달라질 것이다.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외국계 은행이 시중은행을 인수한다면 국내 시중은행 몇 개가 합병하는 것보다 국민은행에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며 "이렇게 된다면 국내 은행도 추가 합병 등을 통해 몸집을 더 키우는 게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외국계 시중은행이 탄생한다면 정부의 금융정책에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최근 정부가 부동산대책을 내놓으며 투기지역에 대출을 죄도록 은행에 '압력'을 넣었지만 제일은행은 꿈쩍도 안 했다. 은행의 팔목을 비트는 방식의 구태의연한 정책은 앞으로 거의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외국계 은행들은 철저히 수익성 위주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중견.중소 기업들이 은행돈 쓰기는 더욱 힘들어질 수도 있다.

◆고객 서비스는 개선=대출금리를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에 연동시킨 상품이 국내에 첫선을 보인 것은 2000년 HSBC에 의해서였다. HSBC의 상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국내 은행도 앞다퉈 이 방식을 채용했고 지금은 은행 대출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외국계 시중은행이 등장한다면 이 같은 신상품.서비스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금융 소비자들의 선택 폭은 그만큼 넓어질 것이다. 전 세계에 영업망을 구축한 외국계 은행은 외환업무에서도 국내 은행보다 한 수 위에 있다.

금융연구원 최공필 연구위원은 "국내 은행들은 외환 위기 이후 건전성이 많이 개선됐으나 선진 금융기법이나 고객 맞춤형 상품에선 선진국 은행에 많이 뒤처진다"며 "국내 은행이 서둘러 대응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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