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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비상상고는 왜 했을까?

중앙일보

입력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비상상고(非常上告)라는 제도는 확정된 판결에 법령 위반 사안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 활용된다. 검찰총장만 신청할 수 있고, 대법원이 단심으로 결정하는 점도 특이하다.

 말 그대로 비정상적인 상황에 사용되기에 현실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2022년 경찰이 폭행사건을 조사하다 피의자와 이름만 같은 엉뚱한 사람의 주민번호와 주소를 조서에 쓴 일이 있었다. 검찰과 법원도 이를 거르지 못해 벌금 70만원이 선고돼 확정됐는데, 벌금 고지를 하는 단계에 가서야 사실이 드러났지만 다른 구제 방안이 없었다. 이런 때 쓰는 게 비상상고다.

형제복지원 사건 재조사했던 검찰
손배소송서 피해자들 이기자 항소
명분·실익 없고 피해자 고통만 가중

 사실관계 오인을 바로잡는 재심과 달리 비상상고는 법 적용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제기한다. 더구나 원래 판결이 피고인에게 불리할 때만 새 판결이 피고인에게 효력을 미친다(형사소송법 447조). 검찰로서는 비상상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실수를 인정하는 일인데 무죄가 나온 피고인을 추가로 벌할 수도 없으니, 이런 사건을 다시 비상상고할 일은 거의 없다.

문무일 검찰총장(왼쪽 두번째)이 27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만나 증언을 들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문 총장은 “검찰이 인권침해의 실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해 불행한 상황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마음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임현동 기자

문무일 검찰총장(왼쪽 두번째)이 27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만나 증언을 들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문 총장은 “검찰이 인권침해의 실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해 불행한 상황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마음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임현동 기자

 2018년 문무일 검찰총장이 형제복지원 사건 판결에 대해 비상상고를 제기했다. 이 사건은 공권력의 방조 또는 적극적인 부추김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불법감금·강제노역·폭행 등 인권 침해를 당한 사안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과거사 사건과 달리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배상 절차가 재심이 아닌 비상상고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인권 침해가 일상적으로 일어난 것은 부랑아를 강제로 수용하도록 한 내무부 훈령 410호(1975년 발효)에 따른 것이었다. 전국 최대 규모인 부산의 형제복지원은 가혹행위와 강제노역의 정도가 심했다. 600명 이상이 석연치 않게 죽었고, 시신은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팔렸다.

경찰이 넘긴 어린이 등 수용자들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경찰이 넘긴 어린이 등 수용자들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1987년 1월 한 젊은 검사가 우연히 강제노역 현장을 목격하고 수사를 시작하면서 실상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검찰 수뇌부가 박인근 원장에 대한 기소를 막았다. 수사 검사가 사표를 내겠다며 버틴 끝에 살인(치사)은 빼고 횡령액을 대폭 줄이는 선에서 타협해 기소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박씨의 불법감금과 횡령 등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는 내무부 훈령에 따른 정당한 업무위임이라는 논리로 낮에 벌어진 불법감금은 무죄라고 판단했다. 문제의 훈령은 수사가 시작되자 정부가 급히 폐지했지만, 소용없었다. 대법원은 이른바 ‘낮합밤죄(밤에 문을 걸어잠근 것만 유죄)’라는 희대의 판결마저 뒤집고 불법감금을 모두 무죄라고 봤다. 박씨는 2년6개월만 복역한 뒤 풀려나와 형제복지원을 이름만 바꿔 다시 운영했다.

 잊혀 가던 형제복지원의 진상은 피해자 한종선씨가 2012년부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나긴 논란 끝에 검찰이 재조사를 시작했고, 결국 비상상고라는 보기 드문 카드를 꺼낸 것이다. 대법원도 비상상고 자체는 기각했지만, 판결문에 “헌법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된 사건”이라고 적시해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국가를 상대로 16건의 소송이 시작됐다. 이 중 지난해 12월과 올 1월 말, 두 건의 1심 판결이 나왔다. 승소한 피해자는 39명, 배상액은 180억원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법무부가 지난달 첫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나머지 사건도 항소할 것으로 보인다. 국가소송에서 지면 일단 항소부터 하는 그간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그래야 공무원들이 면책된다는 믿음 때문일까.

(서울=뉴스1) 박정호 기자 =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관계자 등이 3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 손해배상 소송 선고 공판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1.31/뉴스1

(서울=뉴스1) 박정호 기자 =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관계자 등이 3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 손해배상 소송 선고 공판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1.31/뉴스1

 하지만 이 사건은 검찰이 먼저 뼈저리게 반성한다며 비상상고를 했고, 법원도 재판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지만 다른 소송으로 책임을 묻는 게 좋겠다며 판을 깔아준 사안이다. 소송 결과도 기존 판례를 그대로 따랐다. 불법구금 1년당 8000만원으로 정한 배상액은 이미 다른 과거사 사건에서 확정된 위자료 한도를 넘지 않았고, 소송을 제기할 시효가 지났다는 주장을 기각한 논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항소나 상고를 해도 이대로 확정될 게 뻔하다.

 법무부는 무엇을 바라고 항소했는지 궁금하다. 정말 판례를 뒤집을 자신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에 벌인 잘못과 비상상고의 취지를 다시 부인하자는 것일까. 명분도, 실익도 없는 항소에 피해자들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글=최현철 논설위원, 그림=이유정 인턴기자